4.나의 30대는 사춘기였다
나는 아무것도 없이 서른을 지나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며 살아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어디쯤에 서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직장에선 괜찮은 척 일하고, 쉬는 날이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버겁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눌린 채로 하루가 흐르고, 해가 져도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습관처럼 퇴근 후엔 집으로 곧장 향했다. 괜히 불안해서, 마치 저녁 여덟 시까지는 도착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처럼.
정해진 틀 안에 내가 있어야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다 문득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면,
‘지금 내가 웃어도 되는 걸까?’
스스로를 탓했다.
행복해지면 안 되는 사람처럼, 벌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은 복잡했고, 가슴 한켠은 늘 시리고 쓰렸다.
어느 날은 혼자 술을 마시다 울었다.
아이 얼굴이 보고 싶어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를 짓눌러서,
이 삶이 왜 이렇게 아픈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그렇게 나는 눈물 속에서 서른을 지나고 있었다.
“이혼녀”, “돌싱”
그 단어들이 나를 따라다녔다.
누가 나를 손가락질하는 것 같고, 내 뒤에서 험담이 들리는 듯했다.
마치 벌거벗겨진 채 세상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정작 아무도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숨고, 작아지고 있었다.
부모님께 언성을 높여본 적 없던 내가,
어느 날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깨달았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만만하게 여긴 존재가 부모였다는 사실을.
직장에서도 항상 전전긍긍하며 속으로만 삼키던 내가,
처음으로 불만을 이야기하고 내 의견을 말했다.
그제야 비로소 조금 웃을 수 있었고, 사람들과 다투기도 하며
진짜 ‘나’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혼을 통해 뒤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10대와 20대, 나는 부모님이 짜놓은 틀대로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사랑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그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기에 의심 없이 따랐다.
그리고 그 끝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원하는 것’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혼 후에야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꿈꾸는지.
늦게 찾아온 이 물음들은 깊은 후회와 함께 가슴을 후벼팠다.
그러다 친구들과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그 낯선 땅에서,
나는 마음껏 웃고 울었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거리 위에서
처음으로 ‘자유’라는 감정을 느꼈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가고 싶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처음으로 느릿하게 걸어보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고,
그저 그 순간을 느끼며 살아보았다.
물을 무서워하던 내가 바다에 들어갔다.
‘해보자. 죽기밖에 더 하겠어.’
그렇게 작은 용기로 내 안의 두려움을 밀어냈다.
그 여행은 내게 온전히 ‘나’를 마주할 수 있었던, 처음이자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쥐려고 했던 건 아닐까.
내 그릇은 작은데, 그보다 큰 욕망과 기대를 억지로 담으려 했던 건 아닐까.
애초에 자라온 환경이 평범한 결혼생활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
그걸 꿈꾼 내가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질문들은 마치 사춘기 시절처럼 날 혼란스럽게 했고,
나는 끝없이 주절거렸다.
나는 아직도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지만 이 질문들이 언젠가는
내 삶의 방향을 비춰줄 빛이 되어줄 것이라
조금은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