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이탈리아 가정에는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따뜻한 집밥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스페짜티노 디 만조(Spezzatino di Manzo), 소고기와 토마토, 감자를 오래 끓여내는 스튜죠. 그리고 이 스튜의 뼈대가 되는 국물이 바로 브로도 디 만조(Brodo di Manzo), 소고기 맑은 육수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요리가 세계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왜일까요?
스페짜티노는 프랑스의 부르기뇽(Boeuf Bourguignon)처럼 레스토랑 간판 메뉴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늘 “논나(할머니)의 일요일 집밥” 같은 위치에 있었거든요. 레스토랑 대신 식탁 위에서 가족과 나누던 음식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국제적 무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요리는 조리학교와 미슐랭 문화 덕분에 레시피가 정형화되어 퍼졌습니다. 반면 이탈리아의 스페짜티노는 집집마다 방식이 다르다 보니,
“공식 레시피”가 부족하고, 문헌 기록도 희박합니다.
그래서 해외 요리책이나 레시피 사이트에서 찾기 어려운 것이죠.
이탈리아 음식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건 파스타, 피자입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자리 잡은 이 거대한 인기 메뉴들 사이에서 스페짜티노 같은 “집밥 스튜”는 상대적으로 가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브로도는 4시간 이상.
현대인의 생활에서는 쉽게 시도하기 어려운 조리 시간입니다. 그래서 정통 레시피 대신 압력솥 버전이나 간편 레시피만 온라인에 남았고, 본래의 모습은 잘 알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르기뇽은 와인, 굴라쉬는 파프리카, 브라운스톡은 구운 풍미처럼 뚜렷한 개성을 가졌습니다. 반면 스페짜티노는 토마토와 브로도의 순수한 맛이 중심이라
강렬한 인상을 주기보다 담백하고 은은한 맛을 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겁니다.
다른 스튜와의 비교
Boeuf Bourguignon (프랑스)
레드와인으로 깊고 중후한 풍미를 뽑아내는 스튜.
영화 [줄리&줄리아]를 계기로 전 세계적 인지도를 얻었습니다.
Gulasch (헝가리/중부유럽)
파프리카 파우더의 붉은 향과 강렬한 맛으로 유럽 전역에서 사랑받는 스튜.
국가 정체성과 연결될 만큼 강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Beef Brown Stock (프랑스 브라운 스톡)
뼈와 고기를 오븐에 구워 갈색 풍미를 끌어내는 기초 스톡. 데미글라스, 에스파뇰 소스 같은 프랑스 고급 소스의 뼈대라 요리학교에서도 반드시 배우는 “표준”이 되었습니다.
이들과 달리, Spezzatino di Manzo는 와인의 무게도, 파프리카의 강렬함도, 브라운스톡의 구운 풍미도 없습니다. 대신 토마토와 브로도의 순수한 감칠맛, 감자와 당근의 달큼함, 고기의 담백한 힘으로 완성됩니다.
스페자티노와 브로도는 화려하게 각인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만의 매력을 간직합니다.
“레스토랑 요리”가 아닌 집밥의 깊이,
“강렬한 향신료”가 아닌 재료 본연의 맛,
이것이야말로 이탈리아 가정 요리의 철학 아닐까요?
인지도는 낮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새롭고, 더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느린 시간 속에서, 맛을 통해 한 나라의 생활과 문화를 조금 더 깊게 이해하게 됩니다.
저는 단순히 전통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싶었습니다. 브로도를 진하게 뽑아내고, 고기를 바싹 구워 풍미를 끌어올리는 방식. 그리고 토마토와 감자를 통해 집밥의 따뜻함을 유지하면서도, 레스토랑식으로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시도. 그 과정은 단순한 요리법의 나열이 아니라, 시간과 재료, 그리고 문화에 대한 재해석에 가깝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이 글을 시작으로
“스페짜티노와 브로도”를 저만의 레시피로 재해석해 기록해보려 합니다. 단순히 ‘이탈리아 집밥’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부르기뇽이나 굴라쉬와는 다른, 토마토와 브로도의 세계를 깊이 탐구하는 레시피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1. 양파와 셀러리는 다지고 당근은 깍두썰기 해 주세요.
양파와 셀러리는 잘게 다져야 소프리토(soffritto)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줍니다. 소프리토는 이탈리아 요리의 향신 채소 베이스로, 국물과 고기 전체에 은은하고 깊은 풍미를 스며들게 하지요.
반면 당근은 고기와 함께 먹을 건더기 역할이라 큼직하게 썰어야, 오랜 시간 끓여도 형태가 남고 달큼한 맛이 육수에 천천히 녹아듭니다. 즉, 같은 재료지만 ‘향을 주는 채소’와 ‘건더기로 먹는 채소’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2. 고기는 두껍고 큼지막하게 썰어주세요.
스페짜티노는 ‘잘게 썬 고기’라는 뜻이지만, 실제 조리에서는 너무 작게 자르면 장시간 조리 과정에서 쉽게 부서져 버려요. 고기가 국물에 녹아 사라지는 대신, 씹는 즐거움이 남아 있어야 하거든요.
따라서 지름 4~5cm 정도로 큼지막하게 썰면, 푹 익혀도 결이 살아 있고, 포크로 잘라먹을 때 촉촉한 육즙을 느낄 수 있습니다. 크기가 커야 오랜 시간 브레이징을 거쳐도 ‘부드럽지만 형태가 유지되는 고기’가 완성됩니다.
3. 고기 표면에 밀가루를 얇게 발라주세요.
밀가루를 살짝 묻히면, 고기를 구울 때 표면이 더 잘 갈색화되며 고소한 풍미가 납니다. 또 조리 도중 육즙이 빠져나오는 걸 막아주어, 고기 속살은 촉촉하게 지켜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튜가 졸아들 때 소스가 자연스럽게 걸쭉해진다는 점이에요. 밀가루가 일종의 루(roux) 역할을 해서, 별도로 농도를 내지 않아도 소스가 부드럽고 진하게 완성됩니다.
핵심은 “너무 많이 묻히지 말고 얇게 털어내야 한다”는 것. 그래야 텁텁하지 않고, 깔끔하게 농도만 잡힙니다.
4. 고기 표면을 올리브유로 강하게 시어링 해주세요.
달군 냄비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큼직하게 썬 고기를 넣어 표면이 갈색이 될 때까지 강하게 구워줍니다.
이 과정에서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나며, 단순히 삶은 고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고소함과 감칠맛이 만들어져요. 시어링 할 때 나온 갈색 육즙(팬 드리핑)은 이후에 와인과 브로도로 디글레이즈하며 소스에 녹아들어, 풍미의 바탕이 됩니다.
고기를 한꺼번에 넣지 말고, 겹치지 않게 나누어 굽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야 물이 나오지 않고, 표면이 제대로 구워집니다.
5. 고기를 빼고 다진 셀러리, 양파 그리고 가볍게 으깬 마늘을 넣고 은은하게 볶아주세요.
고기를 건져낸 뒤 남은 올리브유와 갈색화된 팬 드리핑 위에 잘게 다진 셀러리와 양파, 그리고 으깬 마늘을 넣어 약불에서 서서히 볶습니다.
이때 중요한 건 색을 내기보다는 천천히 단맛과 향을 끌어내는 것이에요. 셀러리의 산뜻함, 양파의 달큼함, 마늘의 은은한 풍미가 배어들면서, 이후 토마토와 브로도가 들어갈 때 깊은 층위를 형성합니다.
불은 절대 세게 하지 말고, 투명해질 때까지 은근하게 볶아주세요. 그래야 쓴맛 없이 부드러운 소스 베이스가 완성됩니다.
6. 레드와인으로 디글레이즈 해주세요.
소프리토가 충분히 볶아져 향이 배어들면 레드와인을 붓고 센 불에서 한 번 끓여 팬 바닥에 붙은 갈색 갈무리를 녹여내며 알코올을 날려줍니다. 이 과정에서 고기 시어링 때 생긴 깊은 풍미가 소스에 스며들고, 와인의 산미와 타닌이 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주어 이후 토마토와 브로도, 허브와 어우러질 균형을 만들어줍니다. 와인은 반드시 절반가량 졸여 알코올을 날린 후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7. 본격적인 끓이기
이제 구운 고기와 소프리토, 그리고 로즈마리와 타임 같은 허브들을 함께 넣고 통후추 15알과 페퍼론치노 5개, 토마토 홀을 더해 향과 깊이를 잡아줍니다. 그 위에 준비한 브로도를 고기가 충분히 잠길 만큼 부어 약불에서 천천히 끓이기 시작하세요. 이때 브로도의 역할은 단순히 국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몇 시간 동안 우러난 뼈와 고기의 진한 풍미를 그대로 소스에 불어넣는 데 있습니다. 재료들이 함께 끓으며 토마토의 산미, 허브의 향, 고기의 감칠맛이 어우러져 이탈리아 특유의 따뜻하고 깊은 맛을 만들어냅니다.
8. 체에 거르기
한 시간 반 정도 끓인 뒤에는 고기를 조심스럽게 건져 따로 두고, 국물은 체에 걸러 소프리토를 꾹꾹 눌러가며 즙을 최대한 짜내 주세요. 이렇게 해야 채소에서 나온 단맛과 향이 국물에 완전히 배어들어 깊고 농축된 풍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걸러낸 후 남은 건더기는 버리고, 맑고 진한 국물만 고기와 다시 합칠 준비를 해두면 됩니다.
9. 다시 끓이기
만약 국물이 지나치게 졸아붙었다면 준비해 둔 브로도를 적당히 보충해 농도를 맞춘 뒤, 큼직하게 썬 당근을 넣고 다시 끓여줍니다. 당근은 오래 끓이면 흐물흐물해지고 단맛만 남기 때문에, 국물이 다시 끓기 시작한 후 적당히 익을 때까지만 조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당근은 모양을 유지하면서도 속까지 부드럽게 익어 고기와 잘 어울리는 단맛과 식감을 제공합니다.
이제 1시간 반~ 두 시간 더 끓이면 완성입니다.
1. 감자를 물에 넣고 소금을 조금 넣은 뒤 삶아줍니다.
감자마다 크기와 품종에 따라 차이가 있으니 젓가락을 찔렀을 때 부드럽게 푹 들어가면 다 익은 것입니다.
2. 다 익은 감자 껍질을 까 주세요.
살짝 뜨거울 때 까셔야 더욱 잘 까집니다.
3. 감자를 1차로 으깨주세요.
4. 고운 체에 감자를 눌러가며 걸러주세요.
이 과정을 거쳐야지만 매끈하고 부드러운 크리미 한 감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5. 체에 거른 감자에 우유를 적당히 부어주고 약불로 가열하여 풀어주세요
6. 감자가 풀어지면 버터 한 덩이를 넣고 마저 풀어주세요.
버터의 가염정도에 따라 이때 소금 간을 해 주세요.
7. 크리미 한 매쉬포테이토가 만들어졌을 때 마무리에 넛맥을 살짝 갈아줍니다.
1. 스페짜티노 한 덩어리와 국물을 팬으로 옮겨 강불로 졸여줍니다.
이때 최종적으로 간을 해 주시면 됩니다.
2. 졸아든 소스에 불을 끄고 버터를 녹여줍니다.
3. 바닥에 매쉬드 포테이토를 깔고 그 위에 스페짜티노와 만들어진 소스를 뿌린 후 파슬리 잎으로 마무리해 주세요.
이번 요리는 정통 이탈리아 가정식 스페짜티노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대신 프랑스식 소스 기법과 제 방식의 변주를 더해 조금 더 농밀하고 세련된 형태로 재해석해 보았습니다. 맛은 의외로 상큼하면서도 농후하고 깊은 풍미가 살아 있으며, 고기의 진한 감칠맛과 함께 곁들인 실크 같은 매쉬드 포테이토가 부드럽고 고소한 균형을 잡아줍니다. 꽤 긴 시간을 들여야 하지만, 완성된 접시는 정성과 시간이 배어 있는 진짜 만족스러운 한 끼가 될 것입니다. 한번 도전해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