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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되어보니 이해되는 것과 이해되지 않는 것-上

by LISA

# 절대적이고도 모순적인, 엄마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엄마를 모셔오라고 한 적이 있다. 하루는 시험 성적대로 줄을 세웠는데, 60명 중에 내 뒤에 두세명인가 밖에 없었던 게 문제였다. 나도 꽤 충격을 받긴 했지만 엄마까지 부를 줄은 몰랐기에 잔뜩 긴장한 채 엄마한테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외국은행의 지점장 비서로 일했던 엄마는 굉장히 바빴지만 그래도 바로 다음 날 학교에 같이 가줬다. 담임은 애가 말도 잘 듣고 책도 좋아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데, 공부만 잘하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며 엄마에게 넌지시 학원이라도 좀 보내지 뭐하냐는 핀잔을 줬다. 옆에서 조마조마했던 찰나, 엄마는 웃으면서 "애가 놀고 싶다는데 그냥 내버려두세요"라고 하고는 내게도 그 일에 대해 다시 말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과연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싶다. 그렇다고 내 성격에 애를 들들 볶지는 않았겠지만, 속으로 엄청 걱정하면서 안달복달했을 것 같다.


대신 엄마는 예체능 학원은 참 많이도 보내줬다. 발레, 한국무용, 바둑, 피아노, 바이올린, 플룻, 미술, 골프, 태권도, 검도, 특공무술... 책도 읽고 싶은 게 있으면 빌려보라고 하기 보다는 항상 서점에 가서 사줬다. 생각해보니 정말 공부만 빼고 하고 싶은 건 그 시절에 다 해본 것 같다. 그렇게 나를 방목했던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 되기 직전에 "가까운 중학교에 걸어서 다니고 싶냐, 아침잠도 못자고 버스 타고 멀리 다니고 싶냐"며 '기본'은 할 것을 권유했다. 6년간 공부란 걸 해본 적이 없으니 처음에는 10분을 책상 앞에 앉아있기도 힘들었다. 그러자 엄마는 회사도 그만 두고 날마다 내 옆에 앉아서 교과서를 한땀한땀 읽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0분이었던 것이 20분, 30분, 1시간으로 점점 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반에서 5등 안에 들었을 때 부모님은 내가 좋아하는 커다란 꽃다발을 사줬다. 그리고 그 다음 시험에서는 1등이 됐고, 이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그랬다. 하지만 시험이 끝날 때마다 큰 꽃다발 선물은 늘 잊지 않았다. 또 혼자 알아서 수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있게 됐을 때도, 엄마는 줄곧 옆에 같이 앉아서 다른 책을 읽거나 내게 손편지를 써줬다. 당시 편지를 떠올려 보면 뭐 심오한 문장은 하나도 없었고 '이쁜 우리 딸', '하트 뿅뿅' 같은 유치한 낙서와 그림만 가득했는데 그게 그렇게 재밌었다.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꽤나 치맛바람이 드센 곳이어서 내가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다른 엄마들이 그렇게 궁금해 했지만, 사실 나는 학원에 다닌 적이 없다. 내 선생님은 엄마였다. 물리적으로 뭔가를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내가 공부에 재미를 붙인 데 있어서 그만큼 절대적인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자녀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배짱도 있고, 강단도 있고, 동시에 가끔 어려움이 있어도 늘 낙관적이었던 엄마였다. 아마 삼촌만 셋에, 막내 공주님으로 자랐던 영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어서도 젊고 명랑한 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가세가 예전같지 않고 건강도 오르락내리락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엄마도 꽤 약해졌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내가 취업을 하면서부터였다. 수십년을 살아도 영 성격이 맞지 않는 아빠와도 쌓인 게 많아 힘들었을 거다. 딸은 크면 엄마의 친구가 되는데, 각종 커뮤니티 사연에서도 종종 볼 수 있지만 그러다 보면 가끔 감정 쓰레기통이 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하소연을 한 번 시작하면 극단적이 되기도 하고, 내가 같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렇게 싫어하는 게 부담스러울 때가 있었다. 아빠의 모난 성격이 그렇게 싫다고 하면서도 한번씩 보이는 비슷한 모습도 아이러니할 때가 있다. 지난해에는 개복 수술을 할 일이 있었는데, 사실 처음이 아닌데도 너무 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엄마를 보면서 새삼 일흔이 됐다는 걸 실감했다.


또 내가 어렸을 때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손주에 대해서는 죽고 못 산다. 물론 나도 외동인데다 딸이어서 안전 같은 문제에는 엄청 예민했지만 최근엔 차원이 다르다. 안전 문제는 물론이고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하는데 학습지만 해서는 부족한 것 아니냐.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건 어떠냐"(나는 그냥 유치원도 1년밖에 안 다녔는데...), "피아노도 배우고 싶은가봐"부터 시작해서 유치원에 조금 성질이 있는 것 같은 친구가 있으면 경계하기 바쁘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엄마가 옛날에도 그랬는데 내게 티를 안 냈던 걸까,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변한 걸까. 아니면 내리 사랑이라고 이제 딸보다 손주가 너무 귀해서 더 난리인 걸까.


부모가 돼봐도 여전히 부모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또 이제는 조금씩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손주에게 "할머니의 엄마가~"라며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는 엄마를 보고 있지면, 엄마도 여전히 그렇겠지 생각이 들어 살짝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 나를 돌봐줬던 외할머니가, 엄마가 가끔 말로 톡톡 쏘고 출근할 때면 내게 픽 웃으며 "저 못된 가시나"라고 했던 게 문득 생각이 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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