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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되어보니 이해되는 것과 이해되지 않는 것-下

by LISA

# 가깝고도 먼, 아빠


엄마가 절대적인 존재였다면 아빠는 강력한 존재였다. 영화 '테이큰' 속 리암 니슨처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해결해줄 것만 같았고 실제로 상당 부분 그랬다. 어릴 때 짖궂은 남자애들이 좀 괴롭힐 때면 남의 집 애들한테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눈물 쏙 빠지게 혼낸 뒤 집에 불러 맛있는 걸 잔뜩 사주며 재밌는 이야기도 해줘서 팬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신림동에서 고시는 못하겠다고 주저 앉았을 때, 학원가 앞에서 수험생들 다 보는데 쪽팔리게 큰 소리로 면박을 잔뜩 주고서는 집에 와서는 절대 늦은 게 아니라며 먼저 플랜B부터 Z까지 제안해줬던 게 아빠다.


아빠는 좋게 말하면 카리스마가 넘치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극단적이다. 아들만 찾는 양동마을 후손에, 장남이기까지 했던 아빠는 엄마가 딸인 나만 낳고 더 이상 안 낳겠다고 해서 집안이 뒤집어졌을 때 과감하게 엄마를 선택했다. 집안에서는 웬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남의 집 간판(?)을 내리려고 한다고 난리가 났고 명절마다 싸움이 벌어졌던 것 같다. 내 최초이자 마지막 친가에서의 기억은, 아빠가 할아버지와 대판 한 뒤에 나와 엄마 손을 잡고 집에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 할아버지와 일가 친척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몇 년 전 장례식장에서 볼 수 있었다. 물론 할아버지한테 어렸을 때부터 쌓인 것도 많았겠지만, 장남이 집안과 절연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빠는 할아버지 사후에 화장한 뒤 나온 뼛가루를 보고 그렇게 펑펑 울었다.


사업을 했던 아빠는 100만원을 벌든 1천만원을 벌든 그걸 그대로 늘 엄마에게 갖다줬다. 그리고 엄마가 어디에 썼는지, 어떻게 저축을 했는지 일절 묻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남편은 지금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성리학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그렇게 남존여비 비슷한 발언을 잘 하면서도, 막상 딸인 내게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건 나를 거의 아들로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늘 내게 이언적 가문의 다음 별이 될 거라고 강조했다.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손자가 태어나고 나서는 당신 아들로 생각하는 건지 다시 남녀차별이 심해졌다. 얘는 이씨가 아니고 임씨지만, 얼굴만 봐도 외탁 아니냐며 얘가 우리 가문의 다음 별이라고 또 다시 강조하고 있다.


유년시절 아빠와의 생생한 기억은 마을 어귀에서 낙엽을 주워 종이에 붙이고, 아래 손글씨를 써서 코팅을 해 기념했던 것부터 주말 아침마다 산에 올랐던 것 등 다양하다. 외식을 하면 엄마는 열심히 먹기 바빴고 늘 아빠가 나를 안고 먹여주었다. 먹기 싫어할 때는 밥 안에 몇가지 반찬을 숨겨놓고 보물 찾기를 하자며 달래 끝까지 먹이곤 했다. 엄마가 퇴근할 때면 무등을 태워 마중 나가서 놀이터에서 기다리곤 했던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와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다.


워낙 한번 폭발하면 그동안 잘해줬던 것도 싹 잊게 만들 정도로 폭언을 해대는 아빠라 청소년기부터 점점 멀어지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거리가 생긴 건 취업을 하면서부터였다. 사업가들의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도 '연줄'을 최대한 동원하려는 습성이 있다. 기자가 되고 나니 아무래도 관공서든 업계든 고위 취재원들과 많이 만나게 되는 편인데 언젠가부터 자꾸 그들과 만나게 해달라고 하고 사업 아이템을 전달해달라고 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나는 그런 걸 극도로 싫어해서 매번 거절했고, 김영란법까지 발효되면서부터는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됐는데 내가 못한다고 할 때마다 아빠는 집안을 뒤집어놓았다. "넌 이제 내 딸이 아니다"는 말은 수백번도 더 들은 것 같다. 물론 그 다음날은 또 하하호호 했지만. 하여튼 몇 번의 큰 사건을 겪고 나서 나도 학을 뗐는지 아예 말을 잘 섞지 않게 됐다.


'만물콤플렉스설'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유년시절의 아픔으로 꼬인 것인지 아니면 그저 괴팍했다고 알려진 할아버지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인지 영 좋지 못한 성격도 갈수록 멀어지게 된 원인 중 하나다. 어렸을 때는 아빠가 폭발할 때마다 너무 무서웠는데,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무서운 것보다도 짜증이 나기 시작해서 그저 내가 잘못했다고 하고 대충 넘어가기 바빴다. 뻗대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악화만 되는 걸 깨닫고 빨리 끝내려면 '넵봇'이 돼야 한다는 걸 진작 알았다. 아빠의 이 다혈질과 폭력적인 언사는 당연히 결혼할 때도 장애물이 됐는데, 남편이 상견례 후 눈치 채고 토낄까 말까 고민하는 게 다 보일 정도였다. 결혼을 한다고 쳐도 완전히 독립하지는 못할 걸 알았던 나는 상당히 걱정이 됐다.


하지만 의외로 그 걱정은 가정을 파탄낼 정도의 것은 못됐다. 물론 친정에서 육아를 반쯤 해주는 상황이라, 고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빠도 먼저 이야기했듯이 아직도 딸은 출가외인이고 사위는 백년손님인 시대인건지, 막상 분가를 하고 나니 예전같지 않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빠는 그걸 예견해서 결혼식 때 그렇게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내 결혼식 때 온 하객들은 아빠가 하도 울어서 집안에 무슨 사연이 있나 궁금해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국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도 종종 생각나는 요즘이다. 품 안의 자식은 이제 자기 새끼를 키우느라 제 날개를 달고 새 둥지를 틀었다. 둥지가 다르니 난리를 칠래도 치는 데 한계가 있다. 다행이기도 하고, 마음이 조금 아픈듯도 하고. 하지만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큰 일에 부딪히면 여전히 나는 (누구와는 달리) 전폭적으로 날 지지해주는 아빠를 찾게 된다. 역시 인생은 모순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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