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주년을 눈앞에 두고
이 결혼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판단은 유보하기로 한다. 대체로 표면적인 문제는 없었고, 이따금 폭발했지만 가끔 행복하기도 했으니 이도 저도 아닐 수도 있겠다. 올해 8월이면 10주년인데, 앞으로 10년을 더 살면 성패를 가늠할 수 있을까. 중간 정산을 해보자면 지금까지 내 결혼 생활은 크게 술과 애정결핍,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애주가와 논알콜
남편은 아내와 집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소박한 꿈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언론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논알콜이고 14년 이 일을 하면서 한 방울도 마신 적이 없다는 걸 주변 모두가 안다. 사내 부부인 남편도 내가 입사했을 때부터 알았다. 궁금한 건 애주가이면서 왜 논알콜인 걸 알고도 결혼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논알콜이라고 해서 애주가를 들들 볶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안전과 직결된 문제가 발생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정이 넘을 때까지 어디인지, 누구와 있는지, 언제 오는지 연락 한 번 하지 않았고 너무 새벽까지 연락이 없다 싶으면 살아있는지 궁금해서 카톡 한 번 넣어두는 정도였다. 사실 같은 기자에, 같은 회사에, 만나는 사람과 동선이 뻔하기도 하고 바가지 긁을 만큼 부지런한 체력도 못 됐던 이유가 크기는 하다.
평일에 그렇게 마시고도 주말에 집에서 술을 마실 때면 앞에 앉아서 말동무를 해주기도 했다. 워낙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남편은 그나마 술을 마시면 이야기를 좀 하는 편이라서 때로는 대화가 고플 때 내가 먼저 와인이나 전통주를 집에 사놓기도 했다. 또 술을 보면 궁금해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기도 했다. 술로 구박하더니 왜 자꾸 집에 사놓느냐면서도 결국에는 맛있게 마시는 모습이 뿌듯했다.
# 삼세판도 부족했던 신혼 전쟁
술 문제에 노이로제가 걸린 것은 결혼식 약 2주 전이었다. 새벽 5시께인가, 친정에서 곧 기상하려는데 남편이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큰일이 생겼다며 병원에 있다고 했다. 회사에 보고하고 병원에 달려가보니 8자 붕대를 한 채 축 처진 어깨로 앉아있는 남편의 뒷모습이 보였다. 전날 회사 선배들과 만취할 때까지 마신 뒤 돌계단에서 굴러서 쇄골이 부러졌다고 했다. 쇄골은 원래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붙는데, 의사에게 2주 뒤 예식이라고 했더니 비웃으면서 - 내 기분 탓이었을 수도 - 수술을 해주겠다고 했다. 갑자기 전신마취를 해야 한다고 하니 걱정도 됐고,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는 기도하면서 조금 울기도 했다. 간사하게도 수술이 잘 되고 나니 병실에서 출퇴근 하면서 점점 화가 났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평생 이걸로 기선제압해야겠다'는 유치한 생각도 했던 것 같은데, 기선제압은 커녕 그게 시발점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신혼여행은 발리로 떠났는데 같이 물에 한 번도 못 들어갔던 것부터 쇄골에 박힌 티타늄 때문에 공항에서 계속 삑삑 경보음이 울렸던 것까지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대형 사고를 치고 결혼했으니 이런 사고는 없을거라 기대했지만 이후로도 크고 작은 사고는 이어졌다. 노트북이나 지갑 분실은 소소한 축에 속했고, 방바닥에 실례를 하는 바람에 혼자 욕하면서 치워도 봤다. 간만에 데이트하기로 했던 날, 낮술로 만취해 길을 못 찾아서 나를 종각 한복판에 한참 서있게 한 적도 있었다. 술 취한 사람을 상대할 때 가장 화가 나는 포인트는 화를 내봤자 상대는 심신미약 상태이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당시에는 참고 '내일 두고 보자' 하면서 잠이 들곤 했는데, 그렇게 이를 갈면서 자고 일어나면 또 어느 정도 누그러져서 화의 폭발력이 줄어든다는 게 문제다.
처음은 쇄골이었지만 다음엔 머리가 깨질 수도 있으니 신혼 때 술 문제를 반드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나는 나름대로 갖은 수를 다 써봤다. 크게 화도 내봤고, 눈물로 호소하며 얼러도 봤고, 인사불성인 틈을 타 뺨도 때려봤으며, 가출해서 호텔에서 자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뭐든지 삼세판이라는데 삼세판은 커녕 다섯 손가락도 부족해져 갔다. 신혼 시절 나의 마지막 카드는 양가에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카드를 쓴 뒤 남편은 한 두어달 간 나와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진짜 어쩔 수도 없었다. 가진 카드를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 네버엔딩, 제발 엔딩
이후로는 몇 년을 잠잠해 나는 술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줄 알았다. 그러나 역시 착각이었다. 몇 년 만에 맞은 뒷통수는 훨씬 타격감이 컸다. 비약인 것 같지만 꼭 그렇다고만도 할 수 없는데,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해롱이가 출소하자마자 교도소 바로 앞에서 다시 약을 하는 장면도 생각이 났다.
둘째를 임신하고 거의 만삭이었을 때,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남편이 만취해서 길에서 굴러 수로에 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몸도 무거운데 첫째도 있으니 움직이기가 불편했지만 슬리퍼만 신은 채 급하게 뛰어나갔다. 남편은 두꺼운 패딩 곳곳이 찢어진 채 안경도 지갑도 없이 스마트폰만 덩그러니 들고 인사불성인 채로 앉아있었다.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경찰에 소방관에 잔뜩 와있어서 너무 부끄러웠다. 게다가 다들 내 잔뜩 부른 배를 보고는 눈빛이 마치 문제 가정의 불쌍한 와이프를 보는 듯 해서 '그런 건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었다. 경찰은 남편이 수로 구석에 떨어져 있어서, 산책하던 개가 짖어 알리지 않았으면 저체온증으로 위험할 수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상은 없지만 혹시 머리를 다쳤을 수 있으니 꼭 응급실에 가보라고 했다.
의료대란을 이렇게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역시 대학병원 응급실은 콜이 떨어지질 않았고 결국 내가 검색해서 찾아낸 다소 허름한 응급실로 향했다. 그렇게 첫째와 태중의 둘째까지 모두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남편은 계속 담배 피러 나가야 한다며 헛소리를 했고 구급대원은 한숨을 쉬며 좀 누워 계시라고 했다. 응급실에서 확인한 결과 놀랍게도 어디 하나 부러진 데가 없었고 머리도 멀쩡했다. 다행이었지만 동시에 든 생각은 '다음엔 다행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집에 오는 순간까지도 남편은 술이 깨지 않았고, 집에 도착해 안방에 재운 뒤 마루 소파에서 선잠을 자는 동안 만삭인 몸으로 과부가 돼 상복을 입고 장례식장에 있는 꿈을 꿨다. 새벽녘 남편은 손을 잡고 한참 미안하다고 했는데, 딱히 화를 낼 기력도 없었고 할 말도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남편은 자괴감이 들면 또 동굴로 들어가는 스타일이라, 이틀 정도 지나서 고깃집에 데려가 소주를 마시게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는 병원에 예약해줄테니 상담을 받아보든지 치료를 해보든지 하라고 했다. 할 말이 없었던 건지, 본인도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건지 남편은 그렇게 했다.
결혼 10주년을 앞두고 다시 나를 강타한 술 문제는 앞으로도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몇 년만에도, 10여 년만에도 재발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늘 이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상대가 얼마나 미안해하고 반성하는지의 문제와는 별개로, 현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