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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성패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다-애정결핍

by LISA

# 산소 공급과 멀어지다


'사랑의 시작은 열정이고, 사랑의 지속은 인격이며, 사랑의 끝은 성실이다'라는 말에 참 공감한다. 하지만 열정, 인격, 성실이 단계별로 하나씩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열정에 인격이 더해지고, 그에 성실이 더해져야 완성이 되는 게 아닐까. 철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결혼해서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데도 열정과 설렘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다정함과 소통은 중요하다. 결국에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책 제목도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워낙 무뚝뚝한 남편은 시작할 때도 딱히 열정은 보여주지 않았는데, 그래도 설렘은 가끔씩 느껴졌다. 요즘 말로 '츤데레'처럼, 가끔 단타로 보여주는 다정함이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애교가 많은 편은 아니고, 낯간지러운 이벤트 같은 것도 싫어해서 프러포즈나 스튜디오 웨딩촬영도 생략했을 정도다. 하지만 고전적인 데가 있어서 다정한 손 편지와 꽃 선물 같은 것에는 한없이 약해지는 편이다. 또 일상에서의 소소한 대화나 위로, 공감도 내게는 산소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신혼 때 술과의 전쟁 등을 치르면서 나 또한 인격의 바닥을 보인 데다, 대화의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우리는 점점 멀어졌다.


# 궁합이란


말만 살갑고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보다는 재미는 좀 없어도 우직하고 한결같은 사람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게 왜 양자택일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절충되는 지점도 있을텐데. 예전에 사주를 봤을 때, 역술가가 "남편에 의해 삶이 변할 팔자는 아니니 그냥 적기에, 네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살아라"고 한 게 생각나서, 그렇게 결혼했다. 다만 결혼 후에 답답해서 찾아간 또 다른 점쟁이는 "남편 자리가 한 칸 떨어져 있어서 누구와 결혼했어도 겉돌 팔자"라고 하던데, 이게 참 아 다르고 어 다른 것 같다.


궁합이란 게 정말 있다면, 우리 부부는 상극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새 유행하는 MBTI로 봐도 나는 F고 남편은 T다. 결혼 전후로는 하도 멜랑꼴리하길래 나와 같은 F인 줄만 알았다. 하여튼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보니 문제 해결 방식도 달라서 늘 갈등이 생긴다. 예를 들어 내가 회사에서 대인관계나 업무적으로 난관에 부딪혔을 때, 나는 위로와 공감을 필요로 하지만 남편은 제삼자처럼 말하곤 한다. 나는 문제가 생기면 조언을 구하기 보다는 해결책을 스스로 찾는 편이다. 내 직관을 믿기도 하고, 추진력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적으로 마음이 힘드니까 그걸 채워줄 사람이 가정 내에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남편은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내게 무슨 조언이나 말을 건넨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른데 위로를 한다고 해봐야 영혼이 없는 게 다 느껴질 거라고 생각해서 딱히 긴 말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갈등이 생겼을 때 푸는 과정도 쉽지 않다. 나는 절대 소리를 지른다거나 폭력을 쓰지는 않지만 말로 상대를 바닥까지 내리 꽂는 편이다. 남편은 종종 사과를 하는데, 마치 인공지능이 사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인지 화가 잘 풀리지 않는다. 또 나는 때때로 한 번 부정적인 생각의 궤도에 들어서면 한없이 구렁텅이로 빠져서 상대가 무슨 희망적인 말을 해도 못 듣는다. 그러면서 회복력은 또 빠른 편인데, 내가 빠져나왔을 때는 상대는 내 말들로 인해 상처를 받을 만큼 받은 상태라 관계 개선이 쉽지 않다. 10년을 산 지금은 어느 정도 서로를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그래도 배려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최근 3년 정도 터널에 갇혀 있어서인지 감정의 진폭이 있는 편이라 여전히 쉽지 않다.


# 애정결핍 속에서 생존하기


이런저런 핑계와 사례들이 쌓이면서 대화와 이해가 줄었다. 대화를 하지 않는 건 아니고 때때로 속깊은 이야기도 나눠보지만 뭔가 영혼이 교감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쌓이니 애정결핍 증상이 나타났다. 외동인지라 어릴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고, 어느 무리에 있든 크게 미움받는 일 없이 나름 주목 받고 칭찬 받으며 살았다. 그래서 애정결핍이라는 단어는 나와 거리가 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반만) 독립해 꾸린 가정에서 채워지지 않는 소통과 사랑의 욕구는 나를 애정결핍 환자로 만들었다. 어쩌면 결혼은 연애와 달리 일상이라는 것을 나는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10년을 살고 아이가 둘인 아줌마라면, 그냥 현생에 집중하고 만족하며 살면 되는 것인데 나는 도무지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나'는 죽을 것 같아 두렵다. 그렇다고 이렇게 애정결핍인 채로 사는 것은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도무지 답을 모르겠지만 일단은 생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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