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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궤적-영영 사라진 취재원(1)

by LISA Apr 01. 2025

어렸을 때부터 내가 기자가 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못해봤다. 국민/초등학교 명찰 제일 아래에는 '나는 000가 되겠다'고 쓸 수 있는 칸이 있었는데, 소설가부터 발레리나, 판사까지 다양한 직업을 적어봤지만 기자는 없었다. 중학생 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는 사법고시든 행정고시든 무조건 고시를 봐서 공무원이 될 줄로만 알았다. 대학에 가서도 1학년 2학기 때부터 이미 행시를 준비했는데, 2차 준비를 하러 간 신림동에서 초장에 그 희한한 동네 분위기에 학을 떼고 만세를 불렀다. 이후에도 잠시 방황하다 결국 특수(?) 공무원에 발을 들였는데, 나는 그때 내가 상당히 자유로운 영혼이란 걸 깨달았다. 도망치듯 나온 뒤 급하게 시험을 본 곳은 결국 언론사였다. 그렇게 전혀 언론 생리에 대한 배경 지식도, 기자 정신이란 것도 없이 기자가 됐다.


워낙 힘들고 폐쇄적인 직장에 다니다 와서인지 마와리와 하리꼬미 생활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지만, 당시에는 세상 밖으로 나와 민간인과 만나고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일진 놀이'를 하는 선배들이 무서울 때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때마다 밥 먹었냐고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시절이었다. 지금은 아예 경찰서 입이 안된다고 하지만 10여 년 전에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고, 친해지면 야식으로 함께 치킨을 뜯다가 출동 명령이 떨어지면 귀동냥도 하곤 했다. 꼰대 같지만 나름 낭만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수습을 마치고 처음 배치 받은 곳은 꽤 큰 관공서 중 하나였다. 배치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내 한복판에서 산사태가 났고, 기관장은 주민 투표를 붙였다가 투표함을 열지도 못한 채 사퇴했다. 그리고 새로운 수장이 왔는데, 그는 사실상 내 첫 취재원이 됐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전 직장에서 퇴임식을 하는 날 찾아갔었다. 복도에서 만난 그는 그냥 이웃집 할아버지 같았다. 누가 봐도 초짜인 나를 붙잡고 그는 복도에서 한 30분 동안 왜 자신이 당선돼야 하는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한 조직을 셋업하는 데 3년이 걸리더라고요. 그보다 더 큰 조직이니 5년이면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요. 10년이면 이 세상도 싹 바꿀 수 있겠죠."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기관장이라 한들 어떻게 개인이 조직을 일거에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내심 약간 '엿 먹으라'는 심정으로 저 말을 제목으로 달았다. 하지만 그 기사는 꽤 많이 읽혔고, 여론의 반응도 좋았다. 나의 목적과는 달리 그도 만족한 듯 했다. 나는 그렇게 그의 1호 마크맨이 됐고 그는 조직에 화려하게 입성했다.


그와 사실 성향은 맞지 않았다. 정치 성향을 떠나서 큰 조직의 기관장이라면 어느 정도는 스케일이 커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너무 디테일 했다. 일하는 걸 보고 있자면, 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나서 다행이지 상사와 직원으로 만났으면 진작 손절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마을 공동체를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에게 "저는 옆집에 숟가락 젓가락이 몇개인지 알고 싶지 않은데요"라고 한 적도 있다.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 왜 굳이 같이 이코노미를 타서 사람 불편하게 하는지도 이해가 안 됐다 - 내게 "개성공단이 5개, 10개만 더 있으면 통일이 바로 될 텐데"라고 해서 경악했던 기억도 난다. 1개만 있어도 이렇게 난리인데 더 만들어서 어떤 사단을 내려고. 이렇게 성향이 달라서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와 가장 가까운 기자였다고 자부하지만, 칭찬을 유독 좋아하는 그에게 한 번도 좋은 말을 한 적이 없다. 이 부분은 나중에 꽤 후회로 남았다. 기사는 기사대로 쓰면 되는 것이고, '잘하고 있다'는 말에 그렇게 인색할 필요는 없었다.


첫 번째 선거는 굉장히 자유로웠던 반면 두 번째 선거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허니문은 애초에 끝났고, 검증의 칼날은 날카로웠다. 첫 번째 선거 때는 무조건 당선된다는 것을 가정하고 배낭에 운동화 차림으로 골목골목을 누볐지만, 두 번째 때는 유세차를 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혹시 3선에도 나중에 도전하겠다고 하면 말려야겠다는 생각도 당시에 얼핏 했다. - 결과적으로 그 직감은 맞았다 - 어쨌든 그는 재선에 성공해 다시 조직에 돌아왔다. 나는 조금 더 마크를 하다 아예 여의도로 부서를 옮겼다. 그는 내심 자신이 친하다고 생각하는 기자가 국회로 가는 것이 든든하다고 생각도 하는 듯 했다. 그렇게 한 발짝 떨어져서 본 그는 늘 일희일비 하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굉장히 일희일비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말로 굳이 표현은 안 했지만 지금은 유력 대권주자가 된 사람과의 정책 경쟁, 지지율 싸움 하나하나에 스트레스를 꽤 받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3선만큼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결국 '현직 프리미엄'을 놓지 못했다.


당시 나는 여의도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다른 편에서 후술하겠지만 워낙 원맨밴드 느낌으로 일하는 편인 나는 팀플레이가 버거웠다. 정치인들을 취재할 뿐인데 팀 내에서도 왜 정치를 하는 건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들은 그 부서에 잘 맞고 잘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기자들이 왜 일면식도 없는 정치인들에게 '선배'라고 하는지부터 이해가 안 됐던 사람이다. 다음 행선지로 택한 곳은 문화부였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내 기자 생활 중의 가장 큰 취재원이었다. 아이를 가졌을 때는 우리 부부를 불러 축하한다며 밥을 사기도 했고 가끔 정무적으로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내 첫 취재원이 사라진 것은 부서를 옮기고 첫째를 낳은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갓난아기를 안고 달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실종됐다는 속보가 떴다. 당시 남편이 캡이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워낙 긴급한 상황일 것 같아 참았다. 그리고 든 생각은, 실종이 아니라 이미 죽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았다. 오늘은 또 한 정치인이 성추문으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가 또 생각났다. 피해자는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복잡했던 것 같다. 그와 나의 연이 깊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내게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연락이 왔다. 그것조차도 뭔가 스트레스였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왜 세금을 들여 장례를 치르느냐는 여론이 많았기 때문에 유족은 쫓기듯이 상을 치렀다. 코로나까지 겹쳐서 빈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공간도 없었고 다들 마스크를 쓴 채 국화 한 송이만 놓고 복도에 엉성하게 서서 짧은 이야기만 나누다 돌아갔다. 첫 조문 때 함께 갔던 공무원은 펑펑 울었지만 나는 영 현실감이 없었는지 영정사진을 보면서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집에 돌아왔는데 발인 전날 저녁에 갑자기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에서 초기 보좌진들을 몇 만났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다시 조문을 했는데 내실에서 유족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미망인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슬프기도 했고 화도 났다. 왜 이 사람은 이렇게 가서 남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가 원망스러웠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이후로도 한동안은 제일 가까운 기자였으니 뭔가 내게는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다. 사건의 실체가 궁금했다기 보다는 - 여기서 여전히 기자 정신이 별로 없음이 드러난다 - 그저 내게 무슨 할 말이 없었을까 궁금했다. 죽기 1주일 전께 연락했을 때 뭔가 기운이 없어보였던 것도 마음에 남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예약 발송되는 메일이나 메시지는 결국 없었다. 몇 주가 흘러 조금 무뎌졌을 때, 꿈에 그가 나왔다. 내가 브리핑룸에 앉아있었는데, 첫 선거 때 늘 두르고 다녔던 피아노 덮개 같은 빨간 목도리를 하고 그가 들어왔다. 나는 "모두 난리가 났는데 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냐"고 황당해 했다. 그는 별 대꾸 없이 웃으며 단상 앞으로 걸어가다 사라졌다. 그 후로 수 년 간 꿈에 또 나온 적은 없으니, 마지막 인사였던 듯 하다.


그렇게 내 첫 취재원은 영영 사라졌다. 초년생 치고는 만나기 쉽지 않았던, 꽤 존재감이 컸던 취재원이었기에 지금도 종종 생각이 난다. 얼마 전에는 당시 출입했던 기자 몇몇과 공무원이 모였다는 포럼에 초대 받아 다녀오기도 했다. 역시 성향이나 가치관은 안 맞지만, 그래도 꽤 많은 것을 했다는 생각은 들었다. 10년이면 세상을 싹 바꾼다던 말이 실현된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조직에 많은 변화는 불러온 것 같았다. 완벽주의인 그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쯤은 조금 평안해졌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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