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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의 환상

by LISA

종착점을 어디서 찍어야 할지 몰라

한참 바닷길을 또 걷고 걸었습니다

듣던대로 돌도 바람도 참 많더군요


이번에도 깨달음은 쉽게 오지 않는군,

한숨 속에 발길을 돌리려던 차

한 여인의 부르는 목소리가 적막을 깼습니다


희고 고운 목덜미를 그대로 다 내놓은 채

옥빛에서 쪽빛으로 이어지는 원피스

오팔 조개를 엮어 만든 귀걸이에

어깨엔 석양과 겹치는 주홍빛 그라데이션의 스카프-

꽤 추웠던 날씨와 이질적이었는데도

자연스럽게 그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어요


그 곳에는

시원하게 우거진 야자수와

용과를 가득 따서 맛보다 낮잠 자는 아이들과

커다란 여름 철새를 타고 나르는 사람들

햇빛도 바람도 파도 소리도

무엇 하나 거슬리는 것 없이,

나도 마치 그곳의 일부였던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날 초대했던 그녀가

이제 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조금만 더 행복하고 싶다고 투정하기엔

용기도 자유도 부족했지만

다시 돌아온 바람 찬 해변에서나마

혹시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말없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미련 가득 돌아오던 길

물질하고 돌아오던 여인들이

나와 같은 풍경을 봤다는 화가의 집을 가리킵니다

축 처진 발길로 들어서니

나와 같은 표정을 한 액자 속 남자가 빙긋 웃네요

'그녀는 항상 그곳에 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게'


#


언젠가 마음이 번잡해 찾은 제주 여행의 마지막 날, 굉장한 에메랄드빛 해변을 발견했다. 희고 고운 백사장부터 기계 염색으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을 쪽빛 바다까지, 마치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듯 했다. 그곳에 서 있는 동안 쌀쌀했던 날씨를 잊을 정도로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이 꼭 꿈결 같기도 했다.


다음 목적지는 이중섭미술관이었다. '황소' 같은 대표작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 어쩐지 발길이 끌려 들른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서귀포의 환상'을 발견했는데, 해변에서 느꼈던 꿈결 같은 따뜻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이중섭의 사진을 본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 느낌만큼은 꼭 기록해놔야겠다는 생각에 나온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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