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가 대립하는 기사를 쓸 때 반론은 필수다. 한쪽 입장만으로 쓴 기사는 반쪽짜리다. 그래서 반론은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생각보다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사를 쓸 때 보통 처음부터 어느 정도의 방향성은 있기 마련인데, 반론을 듣다 보면 그 골조가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럼 그 기사를 포기해야 하는데, 이를 피하고 싶으면 본능적으로 반론을 생략하고 싶어진다. 기본에 충실해 반론을 넣는다고 치면, 분량 조절이 또 관건이다. 방향성만큼이나 충분한 반론을 넣으면 기사에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최소한으로 넣으면 때로는 안 넣는 것보다 더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예 반론을 듣지 않는 것보다는 분량 조절로 골머리를 앓고 그에 대한 대가를 감수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일부 미디어지를 대상으로 언론중재위원회에 반론보도 신청을 한 일이 있었다. 10여 년 기자 생활을 하면서 내 기사가 언중위에 걸린 적은 두어 번 있었지만 - 둘 다 별일 없이 지나갔다 - 피신청인이 아닌 신청인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회사 경영진과 편집국에서는 회사 이름으로 걸어볼 만 한 내용이라고 판단해, 회사 이름으로 냈다. 우리 회사가 미디어지를 상대로 언중위에 조정 신청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소송까진 아니지만 진다면 나로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상황이기도 했다.
사내 변호사의 '첨삭'은 있었지만 거의 A부터 Z까지 모든 걸 혼자 준비했다. 다행히 결과는 성공이었다. 중재위원들은 대놓고 피신청인을 비판했다. 상대가 기사를 쓰면서 반론을 전혀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감정적으로 방향을 정해놓고 기사를 쓰면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최근 언중위는 정정보도까지는 몰라도 반론보도 요청에 대해서는 대부분 신청인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다.
미디어지는 일반 언론사들과는 생리가 좀 다르다. 기본적으로 언론사들은 기자 취재는 지양한다. 하지만 미디어지는 출입처가 언론사인 경우가 많다 보니 기자가 취재원이라서, 기자 취재가 그들의 ABC다. 하지만 기자실에서 매일 얼굴 보는 사이에 기자를 취재원으로 삼고, 동시에 비판으로 대상으로 삼다 보면 아마 반론의 기회를 주는 것조차 껄끄러운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반론의 원칙을 지키는 것은 미디어지도 예외는 아니다. 대관 입장에서 쓰는 기사와 진보 성향이 강한 미디어지의 기사에는 간극이 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주요 취재원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 틀린 것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무조건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이 반론을 아예 까먹게 만드는 참사를 낳는다.
비단 보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반론은 중요하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 지지고 볶으면서라도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싶다면 상대에게 반론의 기회는 제공돼야 한다. 물론 상대가 굳이 반론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소통을 시도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기사로 쓴다면 '연락을 취했으나 닿지 않았다'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