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자가 됐느냐고 물었을 때 "노숙인부터 대통령까지 만날 수 있으니까요"라는 답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면전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개소리"라고 해줄 수 있다. 고리타분하고 정형화된 답변이라서가 아니라, 전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자는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고 동선도 협소하며 반복적인 일상을 보낸다.
수습을 뗀 후 썼던 첫 단독 기사를 떠올려본다. 서울역에서 노숙인들을 퇴거조치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역사 내 노숙인을 방치해 많은 시민이 불편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조치일 수도 있었겠지만, 별다른 대책 없이 그들을 내쫓는 것은 인도적으로도 옳지 않고 풍선효과만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기사 이후에도 코레일은 물론 노숙인들과 직접 닿는 경찰들, 공무원들, 그리고 노숙인들까지 당사자와 관계자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그런 기사는 다시 쓰지 못했다.
관공서든 업계든 출입기자가 되면 결국 고위 관계자들을 상대하게 된다. 그러면서 연차가 쌓일수록 점점 착각에 빠진다. 기자는 기자라는 명찰을 떼고 나면 정말 '낫싱'인데, 그들과 마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치 그 그룹에 들어간 듯 행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의도에서는 배지들을 상대하면 자신이 마치 몇선이나 되는 양 굴고, 심지어 같은 당 출입기자들이 후보가 나뉘어 팀이 나뉘면 희한하게 반목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관공서에서는 주로 국과장들만 상대하다보니 본인이 같은 고위 공무원인 줄 알기도 하며, 그러다 은퇴 후에는 아무도 만나주는 사람이 없어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람도 몇몇 봤다. 물론 고위 관계자와도 거리낌 없이 '맞다이'할 수 있는 정신은 취재에 필요하겠지만, 이상한 가오와 착각은 영 문제다.
그렇게 고인 물에 잠식되는 사이 현장과는 점점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누구보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할 언론인이지만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든 취재의 편의를 위해서든 점점 권력에 기생하는 양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기사에 사람을 위한 기사는 없다. 특히 대관 업무를 하면서 사익(私益 아니고 社益)을 고려하다 완전히 정무적인 기사가 된 글을 보면 한숨이 나올 때도 많았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초탈했는지 그러려니 하게 됐다. 이따금 기사에 안팎에서 정치적 시비가 걸릴 때면 그렇게 괴로웠는데, 이제는 "그럼 니가 와서 한 번 해보든지" 소리가 나온다.
출입처가 바뀌면 괜찮아질까도 생각해봤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점점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타사 대관 선배가 "기자이기 전에 회사원이야"라고 했던 말도 생각난다. 물론 어디에 방점을 찍을지는 기자마다 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최소한 지금의 내 포지션은 회사원이고 그에 익숙해졌다. 알고도 마음대로 쓸 수 없고, 모르고도 다 아는 듯 써야 한다. 이제는 큰 불만도 없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은 골목 곳곳을 누비고, 간절한 한 시민의 수십통 걸려오는 전화도 기꺼이 받았던 때가 떠오른다. 여전히 남들보다는 빠른 손과 직관으로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다. 그러나 그게 회사원의 조건은 될 수 있어도 기자의 조건은 아니란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