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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칼날

by LISA

딱히 비판 정신이 살아있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직업은 무시 못하는 건지 때로는 취재원이나 동료들과 함께 때로는 홀로 마음 속에서 비판의 칼날을 겨눠본다. 대상은 제삼자가 되기도, 상황이나 시스템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애정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칼날은 무뎌서 겉핥기식 뒷담화 정도로 끝나지만, 애정이 있는 경우라면 오히려 날이 더욱 예리해진다.


날이 잘 선 예리한 칼은 한 사람이나 나아가 시스템,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 후벼 판 후에 애정 어린 대안이나 제언이 있는 경우라면 더욱 도움이 된다. 하지만 기자 생활을 좀 하다 보면 비판보다는 냉소가 편해지고는 하는데, 사실 냉소는 순간적인 후련함은 있을 수 있어도 딱히 어디에 도움은 안 된다. 그래서 기사로까지 쓸 수는 없어도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으려고, 또 기사가 아닌 다른 경로로라도 칼을 휘둘러 보려고 노력하지만 연차가 쌓일 수록 쉽지 않다. 눈치 볼 게 많아졌기 때문일 수도, 게을러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일터가 아닌 사생활의 영역에서도 칼날을 휘두를 때도 생긴다. 다만 세월이 흐를 수록 이 영역에서는 자중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게 피해를 유발하는 중요한 갈등이나 싸움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외에는 굳이 쓸데없이 예리한 칼날을 들이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또 그 칼이 그에 쓰는 게 맞는지, 내 판단이 맞는지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가 그렇다.


누군가는 인생을 유목민처럼 살기도, 누군가는 깊은 물에 내려진 닻처럼 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어떤 거센 파도가 쳐도 어떻게든 버티거나 넘어서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더라도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으면 그 환경에서는 무엇이 더 적합한 생존 방식인지 알 수 없으니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문제다. 보기에 너무 느리고 답답해도, 또는 너무 급하고 뜨거워도 그냥 서로가 다를 뿐이다.


그래서 적어도 사생활의 영역에서는, 예리한 칼날을 밖으로 향하게 하기 보다는 내면으로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결코 쉽지 않은 수련 과정이겠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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