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부족하다고 느꼈을까

진짜 너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인가?

by 규현

내가 어렸을 때 나는 항상 배고프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한참 쿨아이 때에 한 시간 만지나도 배가 고프고 매일 뛰는 일이 많은 나이었다 보니 먹는 양이 많았다. 학교 급식은 지금처럼 급식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급식차를 끌고 다녀서 그만큼의 적정한양을 급식 아주머니가 아닌 반 친구들이 나누어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더 많이 가져가려고 하고 더 먹으려고 달려들었던 것 같다. 괜히 꼼수를 부려서 식판 하나에다가 맛있는 반찬들을 미리 다 옮겨놓고선 급식실에 가서 더 달라고 줄을 섰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그때의 배고픔은 단순히 위장에서 올라오는 감각이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생활 방식에 가까웠다. 언제 또 배가 고플지 모르니 미리 챙겨야 했고, 남들이 가져가기 전에 먼저 손을 뻗어야 했고, 내 몫이 사라지기 전에 확보해야 했다. 급식 줄에서의 꼼수는 유치한 장난이 아니라, 그 나이에 내가 배운 생존의 요령이었다.


부족하다는 것이 두렵다


완벽주의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 같다. 거창한 욕심이 아니라, 부족해지면 위험할 것 같다는 두려움.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한다. 칭찬을 들어도 그건 운 좋았던 하루로 정리하고, 실수는 성격의 증거처럼 남겨둔다. 잘한 일은 금방 증발하고, 못한 일은 오래 저장된다. 그러다 보면 삶이 늘 급식 줄 같은 상태가 된다. 누군가의 식판을 훑어보며 내 식판을 비교하고, 내 몫이 줄어들까 봐 계속 서두른다. 실제로는 이미 충분히 먹었는데도, 마음은 계속 더 달라고 줄을 선다.




여행을 하거나 세상에 있는 다양한 경험들을 하다 보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만의 기준’을 만들게 된다.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은지, 결혼을 한다면 어떤 형태의 가정을 꾸리고 싶은지.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준은 점점 선명해지고, 어느 순간 ‘이상향’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하게 굳어진다. 목표치를 가지고 사는 삶은 분명 긍정적이다. 삶의 이유를 만들어주고, 오늘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향이 단단해지는 순간부터 종종 시작된다. 목표가 방향이 아니라 ‘판결’이 되는 순간이 있다. 내 이상향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면, 아직 이르다. 아직 부족하다. 아직 자격이 없다. 같은 문장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목표는 원래 나를 앞으로 끌어주기 위해 존재하는데, 어느새 나를 뒤에서 붙잡는 기준표가 된다. 내가 무언가를 해냈는지보다, 이상향과의 거리만 재게 되는 것이다.


부족함은 습관이 아니다


부족함은 이때부터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습관이 된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이룬 것, 내가 잘한 것을 보는 대신, 아직 없는 것부터 훑는다. 집을 꾸밀 때도 ‘지금 이 정도면 괜찮다’가 아니라 ‘내가 꿈꾸던 느낌이 아니야’가 먼저 떠오르고, 관계에서도 ‘지금 이 사람과의 시간’보다 ‘내 이상형에 맞나’부터 확인하게 된다. 삶 전체가 체크리스트처럼 변하면서, 스스로를 계속 미달 처리하게 된다.


이상향이 견고할수록 오히려 부족함은 더 자주 찾아온다. 기준이 높아서가 아니다. 기준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만’ 단단해서다. 그러니까 수정도 어렵고, 유연해지지도 않는다. 마치 유리처럼 단단한데, 충격에 취약한 단단함. 그래서 조금만 흔들려도 나는 곧바로 결론을 낸다. “나는 아직 멀었어.” “나는 부족해.” “나는 제대로 못하고 있어.” 그 말이 마음에 박히면, 다음 행동은 더 조심스러워지고 더 완벽해지려 한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려다 오히려 부족함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살게 된다.




그래서 결국 내가 붙잡아야 하는 건 더 단단한 이상향이 아니라, 그 이상향을 대하는 태도였다. 어렸을 때의 배고픔이 내게 ‘미리 확보해야 안전하다’는 규칙을 남겼듯, 지금의 부족함은 내게 ‘미리 완벽해야 흔들리지 않는다’는 규칙을 남긴다. 하지만 배고픔이 항상 실제 허기만으로 오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의 부족함도 항상 현실에서 오는 건 아니다. 많은 경우 그건 내가 세운 기준이 만든 그림자이고, 내가 만든 이상향이 나를 향해 던지는 판결문에 가깝다.


나는 이제 안다. 완벽주의는 더 잘 살기 위한 성실함이 아니라, 부족함을 들키지 않으려는 방어에서 시작된다는 걸. 그래서 삶이 힘들어지는 건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목표를 향해 가는 매 순간을 미달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나아졌는지는 보지 않고, 이상향에 닿았는지만 묻는 방식으로 살면, 어떤 성취도 잠깐의 숨만 줄 뿐 오래 배부르게 하진 못한다.


그래서 결론은 단순하다. 이상향을 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상향을 ‘목적지’로 두되, ‘심사 기준’으로 쓰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부족함이 올라오는 순간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한 가지를 묻기로 한다. 지금 이 부족함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신호인가, 아니면 나를 멈추게 하는 경보인가.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나는 더 달라고 줄을 서던 습관에서 한 발 물러날 수 있다.


어쩌면 삶은 끝없이 채우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채우지 않아도 괜찮은지를 배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부족함을 없애겠다고 다짐하는 대신, 부족함이 와도 내 하루를 망치게 두지 않는 연습. 완벽해야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려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연습. 나는 지금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내 안의 배고픔과 이상향이 더 이상 나를 몰아세우지 않도록, 내가 내 삶의 운전대를 다시 잡는 쪽으로.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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