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석

우리 모두에게는 구석이 필요하다

by 주아유

어린 시절, 저는 옷장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나만의 방이 없던 어린아이는 구석진 공간을 찾아 기어들어가곤 했어요. 걸려있는 옷들 밑에 숨어서 나프탈렌 냄새를 맡으며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던 조그만 아이. 옷장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때로는 아늑한 안식처가 되어주었고 때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모험의 장소가 되어주었습니다. 컴컴한 옷장 안이 무섭고 갑갑해질 때면 언제나 할머니가 장롱 문을 열고 저를 찾아내셨습니다. 누군가 나를 찾아줄 것을 믿고 있었기에 그렇게 옷장 안에 들어갔나 봅니다. 그림책을 보다 보니 어릴 적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림책은 구석을 향해 가는 까마귀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까마귀는 아무것도 없는 빈방 구석에 웅크리기도 하고 누워도 봅니다. 텅 빈 회색 벽면을 바라보던 까마귀는 심심했던 걸까요. 아무것도 없던 방안을 침대, 책장, 화분으로 부지런히 채워갑니다. 침대 옆 화분에게 인사도 건네고 옆에 앉아 책도 읽어 줍니다.


이미 충분히 아늑한 방을 만든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방 안을 둘러보던 까마귀는 노란 색연필로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빛이 들어오는 창을 그리는 건가 하고 책장을 넘기다 보니 기하학적 무늬들로 벽면을 가득 채웁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빈틈없이 그림을 그립니다. '아니, 이제 그만해도 괜찮잖아.'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까마귀가 편히 쉬었으면 하고 바랐거든요.


방 안은 환한 그림들로 가득 찹니다. 빈 곳 없이 빼곡하게 채워집니다. 그럼에도 허전했던 까마귀는 깨닫습니다. 방 안에 진짜 필요한 것은 바깥을 볼 수 있는 창이라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까마귀는 창문을 열고 하얀 새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이 모든 일이 특별한 구석이 생기고 난 뒤 일어난 것들이지요.



어린 시절 나의 구석이 오래된 장롱이었다면 지금의 내 구석은 어디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모든 공간이 환하게 밝혀지고 가족들은 언제나 나를 찾습니다. 홀로 있는 시간에도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대에 '나의 구석'이 보여주는 은밀하고 조용한 공간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물리적 구석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의미의 나만의 구석은 내면의 고요와 성찰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언제 마지막으로 나만의 구석에 머물렀나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정적 속에서 자신과 마주했나요? 그 구석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하고 있나요?


어른이 된 우리에게도 구석은 필요합니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잠시 물러나 나를 돌아보는 시간.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걸 책을 보며 깨닫습니다. 작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할 여백의 공간을 제공합니다. 책을 읽으며 각자의 답을 찾아갈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을 선물합니다. 식물처럼 조용히 구석은 자라날 겁니다. 물도 주고 인사도 건네고 충분히 보살피고 나면 언젠가는 드릴로 벽을 뚫는 용기도 생길 겁니다. 세상과 연결되며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엄마의 일상과도 닮은 이야기

작가는 말합니다. "구석에 기대어 앉아 있으면 무척 안심이 되고 편안하거든요."

엄마는 늘 바쁩니다. 아이의 밥을 챙기고 필요한 것은 없는지 항상 살핍니다. 울면 달래주고 걸음마를 시작하면 혹여나 다칠까 눈을 떼지 못합니다. 까마귀가 식물에 물을 주고 책을 읽어주는 모습에서 엄마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까마귀의 돌봄을 받은 식물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이 장면이 제게는 엄마가 아이를 돌보며 쏟는 애정과 눈물과 땀으로 읽혔습니다.

엄마는 점점 희미해지는 자신을 찾고 싶습니다. 빈 벽에 그림을 그리는 까마귀처럼 아이만 선명하게 남아있는 내면에 다른 것들도 채워가고 싶습니다. 일단 구석에서 홀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채워나가고 싶습니다. 누구보다도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는 아늑한 구석이 절실합니다. 구석이 주는 침묵의 힘이 필요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본 그림책

매슬로의 욕구위계이론

매슬로의 욕구위계이론은 인간의 동기와 행동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심리학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인간의 욕구가 계층적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상위 단계의 욕구가 동기화된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다음과 같이 5단계로 구분했습니다.


1. 생리적 욕구: 인간이 생존을 위해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

2. 안전의 욕구: 신체적, 심리적 안전과 보호를 추구하는 욕구.

3. 애정, 소속의 욕구: 타인과의 관계, 소속감, 사랑, 우정, 가족 등 사회적 유대에 대한 욕구.

4. 존중의 욕구: 자신에 대한 존중(자기 신뢰, 성취감)과 타인으로부터의 존중(인정, 명예, 평판)에 대한 욕구.

5. 자아실현의 욕구: 자신의 잠재력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성장하려는 욕구.

추가 단계- 자기 초월 욕구: 자신을 넘어 타인이나 사회, 더 큰 의미를 추구하는 단계. 매슬로의 후기 연구에서 자아실현 단계 위에 자기 초월 욕구를 추가함.


매슬로의 욕구 위계는 일반적으로 피라미드로 표현됩니다. 하위단계(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 위의 단계 욕구가 동기화된다고 주장했는데, 이 피라미드 구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여러 욕구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하위 네 단계(생리적, 안전, 소속, 존중) 욕구는 결핍욕구로 충족되지 않으면 결핍감이 동기를 유발합니다. 자아실현과 자기 초월은 성장 욕구로 자기 계발과 잠재력을 실현하고자 하는 동기자 작용합니다.


조오 작가의 '나의 구석'에서 주인공 까마귀가 자신만의 구석을 찾고 지키려는 행동을 매슬로 위계이론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안전 욕구의 충족: 주인공이 구석을 찾는 행위는 심리적 안전감을 확보하려는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나만의 구석은 외부의 위협이나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상징합니다. 또한 까마귀에게는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고 쉴 수 있는 심리적 피난처가 됩니다. 그곳에서 까마귀는 포근한 침대와 러그 등 아늑한 요소로 공간을 꾸미는 행동은 단순한 인테리어를 넘어 자신을 돌보고 감정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정돈되고 아늑한 환경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며, 개인이 내면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안정감을 느끼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즉, 까마귀가 구석에 자신만의 물건을 들여놓는 것은, 외부로부터 보호받으며 자기 자신을 회복하고, 다시 세상과 마주할 힘을 기르는 심리적 준비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정, 소속의 욕구: 까마귀는 화분을 가져와 대화도 나누고 물도 줍니다. 화분 옆에 앉아 책도 읽어주면서 관계를 형성해 나갑니다. 이런 주인공의 행동은 단순히 식물을 돌보는 것을 넘어 정서적 유대와 소속감을 형성하려는 본능적 욕구를 드러냅니다. 마치 사람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반려동물을 돌보거나, 누군가와 교감하려는 모습과도 닮아있습니다. 까마귀는 화분을 통해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고, 상호작용을 통해 심리적 안정과 애정을 경험합니다. 책을 읽어준다는 건 화분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함으로써 내면의 소속감과 애착을 더욱 깊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존중의 욕구: 까마귀가 벽에 그림을 그리는 행동은 매슬로우가 말한 존중의 욕구 중에서도 자기 존중과 자기표현의 측면과 연결됩니다. 존중의 욕구는 타인에게 인정박고 싶은 욕구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도 포함합니다. 까마귀는 벽이라는 자신만의 공간에 창의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이를 통해 '나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내적 확신과 자신감을 키워갑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와 의미를 창조하고 실현하는 자율적인 행위로 내면의 존중 욕구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실현의 욕구: 까마귀가 창문을 내고 외부와 소통하며 내면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모습은 매슬로우가 말한 자아실현 욕구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자아실현은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본래의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성장하고 변화하려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까마귀가 자신만의 구석에서 안전과 소속, 존중의 욕구를 충분히 채운 뒤,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것은 내면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새로운 경험과 관계를 받아들이는 자기실현의 과정입니다. 이처럼 창문을 내는 행동은 단순한 공간의 확장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 밖으로 나아가 더 넓은 의미의 삶과 만남, 성장의 기회를 추구하려는 상징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매슬로우가 말한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도달하려는 욕구(What a man can be, he must be.)"와도 일치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잠재력을 실현해 가는 자아실현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구석이 필요합니다. 상처받았을 때 치유해 나갈 수 있는 심리적 안전지대이자 나의 세계를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출발점이 필요합니다. 모든 이들이 각자의 구석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텅 빈 공간을 '나'의 시간과 선택으로 채워 특별한 장소로 만들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구석이 완성되는 순간, 오히려 그 경계를 넘어설 용기도 생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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