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자리
웅크린 아이와 토끼는 서로를 꼭 껴안고 있습니다. 둘의 표정을 보니 괜히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가만히 들어주었어'라는 제목에서 어느 정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준 건 토끼라는 것을요.
파란 줄무늬 옷을 입은 아이는 테일러입니다. 테일러는 나무 블록을 자신의 키보다 높이 쌓아 멋진 성을 만들었지요. 자신이 만든 성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 순간, 갑자기 날아온 새들이 공들여 만든 성을 무너뜨리게 되지요. 여기저기 흩어진 블록을 본 테일러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울음을 터뜨립니다.
곧이어 동물 친구들이 하나둘 다가와 저마다의 위로를 건넵니다. 닭은 테일러에게 무슨 일인지 말해보라며 재촉했고, 곰은 화가 날 때는 소리를 지르라고 조언했습니. 코끼리는 자신이 고쳐주겠다며 원래 모양을 말해보라고 했지만 테일러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블록 조각을 치워버리라는 캥거루, 다른 아이들의 블록도 망가뜨리라는 뱀의 말에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은 모두 어쩔 수 없다며 테일러 곁을 떠나지요.
그때 토끼가 조용히 다가옵니다. 토끼는 테일러 옆에 앉아 한참을 가만히 머무릅니다. 말없이 앉아있던 테일러는 자연스럽게 토끼에게 상황을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울었다가 소리 질렀다가 웃기도 하는 테일러의 이야기를 토끼는 묵묵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런 토끼 덕분에 테일러의 마음은 자연스레 풀렸고, 다시 처음부터 블록을 쌓을 수 있게 됩니다.
3학년 도덕 교과서에도 이 그림책이 실려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동물 친구들의 위로 방법 중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선택해 보라고 하면, 의외의 답변들이 나옵니다. 함께 욕해주기를 바라는 아이들도 있고, 혼자 방에 들어가 마음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분 좋은 영상을 보거나 누워서 쉬어야 한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복수를 생각하는 아이도 있었고, 곰처럼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토끼의 방법을 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위로의 방법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깨달은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한다는 건 그 사람이 원할 때,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들어주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람마다 진정 듣고 싶은 말이 모두 다 다르다는 것도 함께 말이죠.
이야기를 들으며 저의 친구가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털어놓는다는 게 다른 사람에게 내 짐을 얹어주는 것만 같아서 꺼려졌습니다. 말하고 나면 미안한 마음에 마음이 더 무거워지기도 했지요. 그런 제 말을 곁에서 묵묵히 들어주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라고 섣부른 조언이나 위로를 건네지 않고, 그저 옆에 앉아 함께 울어주었습니다. 그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친구로 인해 마음은 한결 편해졌습니다. 존재 자체로 위안이 되는 사람이 제 곁에 있다는 게 참 감사했습니다.
반면 힘들다고 털어놓을 때 들었던 조언들이 되려 마음을 더욱 움츠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선의로 건네는 말이 또 다른 짐이 되기도 하지요. 스스로 조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말도 닿지 않습니다. 억지로 끌어내려할 때 마음의 문은 더 꽁꽁 닫히는 법이니까요.
상담 수련 과정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상담을 시연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담 전공자도 아니고 그저 관심이 생겨 시작한 터라, 남들 앞에서 상담자로 상담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굉장히 부담스럽고 긴장되더라고요. 자신이 없었고 중간에 할 말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을 때, 상담사로 일하고 계시던 한 분이 제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그냥 다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 하는 거예요. 앉아서 들어주시고 공감만 해주셔도 마음이 편해져서 가시거든요. 특별한 기술이 없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위에 자신의 말을 있는 그대로 귀 기울여 들어주는 이가 있나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그런 대상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상담소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저절로 자신이 가진 문제를 스스로 정리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가 많으니까요. 물론 상담 공부를 하면서 더 잘 듣고 반응해 줄 수 있는 방법들을 배우긴 했지만, 상담의 가장 기본은 상대방의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며 그 순간을 함께 견뎌내는 것 아닐까 합니다. 경청과 정서적인 지지가 문제해결 중심의 조언보다 훨씬 큰 치유 효과를 가져올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조언보다 침묵이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위로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일입니다. 나의 아픔이 타인에게 온전히 전달되고, 그것이 이해받고 받아들여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됩니다. 그 연결의 순간에서 치유가 시작됩니다. 『가만히 들어주었어』는 이런 소중한 진실을 아름다운 그림과 따뜻한 이야기로 전합니다. 어른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아니 어른이기에 더욱 절실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책은 칼로저스가 제시한 인간중심 심리학의 관점에서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공감, 진정성'이라는 핵심원리를 잘 반영한 작품입니다.
로저스에 따르면 내담자가 자신을 탐색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환경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토끼는 테일러의 감정이나 반응을 판단하지 않고 온전히 수용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테일러의 곁을 지키며, 어떤 감정도 허용해 주는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 주지요.
상담자는 내담자의 감정과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이해하려는 태도로 경청합니다. "경청"과 "기다림"을 통해, 토끼는 테일러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정리하도록 도와주며, 이는 공감적 경청의 자세를 보여주는 예시라 볼 수 있습니다.
로저스는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진심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대할 때 비로소 신뢰가 쌓이고, 치유가 시작된다고 봅니다. 토끼의 행동은 인위적인 위로나 조언이 아닌, 진실되고 일관된 태도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런 토끼의 진심이 테일러에게도 전해진 것이죠.
테일러는 토끼 덕분에 스스로 감정을 마주하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자아실현 경험은 적절한 심리적 태도(공감, 존중, 진정성)의 분위기에서 촉진된다는 로저스의 이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대 속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감추고, 아픈 말들을 삼키며,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조용히 울곤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가만히 들어주었어』는 잃어버린 것들을 상기시켜 줍니다. 솔직하게 아프다고 말할 용기를, 도움을 청할 줄 아는 순수함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에 가만히 머물 줄 아는 여유를.
이 작은 그림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위로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머무르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각박한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 아닐까요. 토끼의 고요한 동행이 테일러에게 새로운 시작의 용기를 주었듯이, 우리의 경청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계속해 나갈 힘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