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씨의 의자

경계를 세우는 용기

by 주아유


커다란 의자에 앉아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곰씨. 햇살을 즐기는 곰씨의 모습은 참 평화로워 보입니다. 시집을 품에 안고 즐기는 따뜻한 차 한잔의 여유. 쌀쌀해지면 덮을 따뜻한 담요도, MP3 플레이어도, 작은 화분도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 곰씨에게 낯선 토끼가 다가옵니다. 커다란 배낭을 멘 토끼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착한 곰씨는 몹시 지쳐 보이는 토끼에게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라고 권합니다. 토끼는 의자에 앉아 쉬지 않고 자신의 모험담을 펼쳐 놓습니다. 곰씨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어느 날에는 몹시 슬퍼 보이는 토끼가 나타납니다. 깡총깡총 춤추었다고 마을에서 쫓겨난 토끼. 곰씨는 다정하게 위로해 줍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별일 아니에요. 괴로워하지 말아요."


곰씨의 의자 앞에서 만난 두 토끼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곰씨는 이들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요.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토끼 부부는 자녀를 낳게 되고, 점점 더 많은 토끼 가족이 곰씨의 공간을 차지합니다. 처음에는 반갑게 맞이했던 친구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곰씨는 자신의 공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햇살을 맞으며 여유를 즐겼던 혼자만의 시간도 사라지지요. 곰씨는 이 상황이 괴롭습니다. 토끼 가족이 상처받을까 말하지 못하고 끙끙대다가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의자 위에 눕고 페인트도 칠해보지만 다 소용없습니다.

곰씨는 큰 용기를 내어 자신의 속마음을 토끼들에게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용히 혼자 책을 읽고 싶다고 말이죠. 고백을 들은 토끼 가족은 곰씨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이후 모두가 각자의 공간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되지요. 곰씨도 자신의 경계를 넘어 숲이라는 더 넓은 공간에서 새로운 자유를 누립니다. 다시 자신의 의자에서 편하게 쉴 수 있게 된 곰씨, 곳곳을 자유롭게 누비며 행복하게 지내는 토끼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엄마가 된 이후로 내 공간이라는 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많은 엄마들도 아마 '곰씨의 의자'를 보며 공감하셨을 것 같아요. 밤마다 엄마가 옆에 없으면 찾는 아이들 때문에 항상 아이들 옆에서 잠을 청했고, 깊은 잠을 자지 못하니 늘 피곤했습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갈 수 있게 된 이후에는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퇴근을 하고 녹초가 된 몸은 혼자서 벌러덩 누워 쉬고 싶었지만,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아이들 밥을 챙기고 숙제도 봐줘야 했어요.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면 자야 할 시간입니다. 주말이 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엄마 좀 그만 불러"라는 노래도 있을 만큼 아이들은 종일 엄마를 찾아댑니다.


그때 제일 하고 싶었던 건 혼자 집에 온종일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행도 필요 없고 그냥 집에서 아무도 없이 혼자서 하루만이라도 푹 쉬면 좋겠다. 근처 원룸이라도 하나 얻어 혼자 조용히 쉬다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곰씨 곁에서 계속해서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토끼들을 보며 화도 났어요.

'저들은 선이라는 게 없나. 정말 눈치 없는 토끼들.'

저는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누워서 충전을 해야 하기에 그런 토끼가 원망스러웠습니다. 딱한 곰씨. 언제쯤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타까웠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저도 곰씨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빨래를 널어달라는 말을 남편에게 하지 못해 혼자 부글대는 마음으로 평소보다도 탁탁 털어가며 빨래를 널었고, '나는 왜 이런 부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일까' 싶어 스스로에게 화도 났습니다. 핸드폰을 보고 앉아있는 남편을 보면 부아가 치밀고, 나만 찾는 아이들도 힘들고 '애들 숙제는 내가 못 봐주겠어. 너무 힘들어.'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학교에서도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속으로만 끙끙 삼킨 적이 제법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보호자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교사는 감정 노동자라는 생각을 했고, 비효율적인 방법을 고집하는 말이 통하지 않는 관리자께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다시 일을 해야만 했지요.


내게 나를 위한 작은 공간과 시간을 선물해주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빼앗기는 기분이 쌓이고 쌓이니 몸도 마음도 병이 나더군요. 그때부터 하나씩 요구하기 시작했어요. "나 진짜 너무 힘들어.", "나도 내 방을 갖고 싶어.", "엄마 1시간만 찾지 말아 줘."라고 말이죠.


내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영역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나를 성찰하고 회복할 쉼터를 갖는 것입니다.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자 나와 타인의 경계를 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의 경계를 세우고 존중받을 때 건강한 관계가 시작됩니다. 곰씨가 자신의 필요를 토끼가족에게 고백했을 때, 비로소 서로의 공간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관계로 나아간 것처럼 말이죠.



심리학에서도 건강한 경계 설정(healthy boundaries)이 자존감, 자기 돌봄(self-care), 정서적 안정의 핵심임을 강조합니다. Nathaniel Branden 등의 자기 존중감 이론, Dr. Arielle Schwartz의 경계 이론 등은 “명확한 경계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첫걸음”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곰씨가 토끼 가족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필요(혼자만의 시간)를 표현했을 때 모두가 행복하게 변화하는 결말은, 경계와 자기표현의 중요성을 드러냅니다. 이는 상담심리에서 건강한 경계 설정, 자기주장(assertiveness) 훈련의 실제적 모델로 볼 수 있습니다.

내 방이 생기고 나의 시간을 갖게 된 이후, 무언가를 시작할 용기가 채워졌습니다. 삶이 좀 더 풍요롭고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어려운 저 같은 사람들, 자신의 힘듦보다 타인을 배려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마는 사람들이 꼭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지나친 헌신으로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대체로 쌓이고 쌓여 터질 것처럼 거대해진 스트레스라는 뾰족한 화살을 결국 자기 자신에게 겨냥하고는 합니다.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이들, 마음이 찢기고 힘든 이들에게 "괜찮아요, 괜찮아요. 말해도 괜찮아요."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No라고 말하는 거 생각보다 별 일 아니에요."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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