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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꽃이 피지 않았을 뿐이다.

나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계절

by 라온


눈에 띄는 변화 없이

정체된 것 같은 시간 속에서도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버티고 있었다.

그저,

제자리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세상은 마치
항상 뭔가를 이루어야만
살아 있는 것처럼 말한다.

꼭 무언가를 이루는 시간만이
의미 있는 건 아닐텐데 말이다.


-

‘이 정도는 해야지.’


‘지금 안 하면

나중엔 기회가 없을 거야.’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나라고 못할 이유는 없잖아.’

-


그런 마음으로
나를 한계까지 몰고 갔다.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 없음에도
가장 독하게 나를 밀어붙인 건

늘 나였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리다
불현듯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 뭔가 잘못된 거구나.’

열심히 사는 것과
나를 학대하듯 몰아치는 건
분명히 달랐는데,
그걸 너무 늦게 알아차린거다.


어떤 꽃은

아주 늦게 피지만,

한 번 피면

그만큼 오래 머문다.

그 즈음,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분명히 자라고 있었다.


나는 지금,
아직 피지 않은 꽃처럼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게 아니다.


어쩌면 이 정적인 시간은
내가 나를 조금씩 회복시키는
가장 필요한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나 자신에게 미안해진다.

그토록 아픈 몸을 끌고도
출근을 했고,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을 했고,
말없이 꾸역꾸역 참아냈던 나에게.

나는 왜,
단 한번도 위로해주지 않았을까.
“넌 정말 잘하고 있어.”
그 한마디조차,
어느 누구보다 먼저

말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늘 나에게 너무 모질었다.


만약 스스로에게

조금이라도 다정했더라면.


꽃에 물을 주어

무럭무럭 자라나듯이,

따뜻한 말 한마디가 거름이 되어

나도 무럭무럭 잘 자랐으려나.


이제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결과는 나중에 와도 좋다고.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이 과정 자체를
사랑해보자고.


꽃이 피는 건 잠깐이지만
그 뿌리를 내리는 시간은

엄청나게 오래 걸린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지금,
나를 다시 길러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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