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미워도 다시 한번

- 세느 경양식에서

by 해피마망


"동건이 엄마가 애를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나는 걔를 받아들일 생각을 했어."

무표정한 얼굴로 엄마는 말을 이었다.

"그때 네 아버지가 몇 날 며칠을 잠을 못 자고

한숨을 푹푹 쉬며 괴로워하더라고.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거리가 있으면 말을 해보라고 여러 번 말을 해도 그저 땅이 꺼져라 하고 한숨만 쉬는데 이거 뭔 일이 단단히 났나 싶었어."

그러더니 한 날은 못 먹는 술을 다 마시고 왔더라고.

엄마는 그때를 기억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여보, 무슨 일이 있길래 잠도 못 자고 왜 그러는 거예요. 고민이 있으면 말을 해서 같이 해결을 해야지요.

"얘기 좀 해보세요."

"내가 얘기하면 당신이 놀랄 거야. 놀라서 쓰러질 거 같아."

"무슨 일이기에 내가 쓰러질 정도예요.

그렇더라도 어서 얘기를 해야지 이러다 당신 먼저 쓰러지겠어요.

무슨 말을 하던 절대로 놀라지 않을 테니 말을 하세요. 속 시원하게..."

큰일이 일어났구나, 남편의 태도를 보면서 여자는 무슨 일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사실은, 사실은... 여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놀라지 마. 화도 내지 말고."

"아이, 절대로 화 안 낼 테니까 어서 말 좀 해봐요.

돈을 잃었어요? 사기를 당했어요?"

"그럼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봐요."

남편은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 쉬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 어우, 여보. 도저히 입이 안 떨어져요."

"... "

남편은 다시 침묵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내일.. 내일 우리 영화 보러 갑시다.."

느닷없는 영화 보자는 말에 여자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좀 자고 내일 영화 보러 가요."

이튿날 12시가 넘어 일어난 남편은 푸석하게 야윈 얼굴로 세수를 하고 함께 집을 나섰다.

연흥극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화표를 끊고 두 사람은 말없이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영화를 봤다.

옆에 앉은 남편은 간간이 "으음~"짧은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감싸 쥐기도 했다.

어젯밤의 대화와, 아니 요 며칠새 말이 없이 부쩍 수척해진 남편이 잠을 못 자며 뒤척이는 모양을 보아온 여자는, 남편에게 큰일이 생겼구나 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영화가 제대로 눈에 들어 올리가 없다.

그저 멍하니 스크린을 주시하던 여자에게 남편이 말했다.

"나갈까?"

여자는 말없이 남편을 따라나섰다.

스크린에서는 문희가 김정훈을 끌어안고 우는 장면이 커다랗게 클로즈업되어 나타났다.


영화관을 나와 조금 걷더니 <세느 경양식> 이란 간판이 붙은 집 앞에서 잠시 멈췄다.

"여기서 밥이라도 먹자."

남편의 말에 여자는 대답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칸칸이 막힌 좌석이 있는 가게 안은 조명이 꽤나 멋있어 보였다.

안내하는 대로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코트를 벗어 얌전하게 개서 옆의 의자에 올려놓았다.

"비프스테이크로 시킬까?"

남편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비프스테이크 둘과 사이다를 시켰다.

잠시 두 사람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고, 패티페이지의 테네시 월츠가 나지막하게 흐르고 있었다.

수프가 나오고 샐러드가 나오고 비프스테이크가 나왔다.

남편은 수프를 두 숟갈 정도 떴고 여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갑자기 입안이 심하게 까슬거렸다.


"아이가 생겼어."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여자 앞에 이상한 말 한마디가 툭! 떨어졌다.

여자는 손을 멈춘 채 그대로 있었다.

"지금 세 살이야."

"여자와는 헤어지기로 했는데 자기는 애를 키울 수가 없대."

남편은 마치 무슨 고해성사를 하듯이 아주 조그만 소리로 말을 이었다.

의외로 남편의 말은 주저함이 없이 술술 잘도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애를 맡게 되었는데.."

남편은 사이다 한 모금을 마셨다.

여자도 사이다를 한 컵 마셨다.

"나를 용서해 줘. 내가 잘못했어."

"당신의 허락이 필요해. 받아주면.."

"좋아요! 내가 키울게요. 데려오세요!"

여자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여자의 말에 남편은 고개를 번쩍 쳐들며 여자를 바라봤다.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키울게요. 데려오세요. 그 애."

여자는 또 한 번 같은 말을 돼 내었다.

"정말이야 여보? "

남편은 놀랍다는 듯 아내의 손을 부여잡았다.

"하늘같이 믿어온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지금 내 마음은 하늘이 무너진 거 같아요.

그렇지만 어떡하겠어요. 이렇게 된 일...

한 번은 내가 하겠어요. 한 번은.

안심하세요.

그러나 이런 일이 두 번은 없겠죠?

있으면 또 말해봐요. 다 말해요."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비프스테이크 접시 위로 떨어졌다.

"여보, 고마워요 고마워. 이런 일 다시는 없을 거야. 진심이야. 미안해 여보... "

남편은 여자의 손을 꼭 부여잡고 어쩔 줄 모른 채 연신 테이블에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고 그의 머리에는 스테이크 소스가 묻어 반짝거렸다.






해피마망의 연작 소설

<소중한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는 매주 월요일에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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