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식(氣息)-불안을 내쉬고, 숨을 마시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서 주인공과 그 친구가 술을 마시며 둘만의 게임을 하는데 이름하여 <희, 비 게임> 그리고 <반의어 게임>이다.
몇 년 전에 친구와 잔을 기울이며 인간실격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말 나온 김에 우리도 희 비, 반의어 게임을 해보기로 했다.
"술은 희야 비야?"
"술? 당연히 희지."
"왜? 술 마시면 칠죄종을 당연시하게 되지 않아?"
"그건 그런데, 너와 이런 대화를 부끄럼 없이 할 수 있잖아? 적당히 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만 있다면 말이야. 자유라고 자유 이건. 속세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주는 유일한 시간. 내가 나인 듯, 너인 듯, 그 누구인 듯, 자아가 희미해져 갈 때 느껴지는 쾌감이 있잖아. 한 번 느끼면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자유..."
"그렇다면 메타인지가 잘 되어 있는 사람한테는 희고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잘 안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비겠구먼."
"뭐 그런 셈이지..."
"그럼 너는 자유가 희라고 생각하는 거네?"
"자유는 희임에 분명하지 않아?. 어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주는 거니까."
"난 자유가 희의 속성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 자유라는 단어가 주는 표면적인 의미는 굉장히 가벼워 보이긴 하지, 무엇인가 훨훨 날아갈 듯이 가벼운 느낌처럼. 그런데 자유의 뒷면, 즉 자유의 그림자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자유의 그림자? 그건 뭐야?"
"내가 만든 단어긴 한데, A라는 선택을 한 뒤 남겨진 무수히 많은 경우를 자유의 그림자라고 해. 인간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 순간 그 결정 외 무한한 가능성은 사라지게 되니까 거기서 오는 불안 같은 거 말이야.
넌 어떤 선택을 하고 후회해 본 적 없어?"
"당연히 있지. 그리고 오늘마저 무수히 많은 선택 뒤에 남겨진 후회를 했고, 심지어 지금도. 근데 그게 난 자유의 부정적인 측면 중 하나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긴 하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중세시대 농노가 현대의 근로자보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는 연구자료를 책에서 본 것 같은데, 그것도 자유의 그림자와 관계되는 건가?"
"오... 맞아 그거야말로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이었는데,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게 우리에게 굉장히 유용하고 합립적일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아. 자유로움이야 말로 인간에겐 비극일 수도 있어. 예를 하나 들어볼까?"
"잠깐. 너 지금 굉장히 염세주의자 같아. 희 비게임을 제대로 즐기고 있구먼 이 친구."
"서두는 비극으로 결미는 희극으로 내는 게 이야기 꾼의 정석 아니겠어? 끝까지 들어봐 봐. 너 시시포스의 형벌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
“옛날에 그리스 로마 신화 책에서 얼핏 본 것 같은데, 시시포스가 신에게 잘 못 했나? 어쨌든 어떤 연유로
시시포스가 커다란 바위를 언덕 위로 무한히 올려놔야하는 형벌이었던 것 같은데 맞아? “
“맞아. 넷플릭스에서 상영한 <피지컬 100>에서도 한 번 나온 적이 있는데,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는 순간 그 바위는 반대편 언덕으로 굴러 떨어지고 다시 그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으면 또다시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지는 게임이었지. 신들을 기만한 이유로 무한히 반복되는 노동이란 형벌을 받은 이야기가 시시포스 형벌이야.
MBTI 극 N인 나로서는 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는데 네가 만약에 시시포스라면 어떻게 그 삶을 견뎌 낼 거야? “
“흠… 무한히 반복되는 노동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 같긴 하네. 일단 니체가 말한 영원 회귀 속 초인과 같이 살아가는 건 어떨까? “
“정말 좋지. 그리고 카뮈처럼 바위를 밀어 올리는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무한한 노동이라는 게 어쩐지 현대의 노동과 닮아있지 않아? “
“맞아. 나도 그 말하려고 했어. 월화수목금 동안 열심히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으면, 투쟁의 결과로 주말엔 반대편 언덕을 내려가며 휴식을 취하는 내가 있고 언제나 그렇듯 다시 바위를 힘차게 미는 현대판 시시포스 그것이 나? “
“비슷하지, 그런데 너와 우리는 시시포스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어. 그게 뭐다?”
“자유? “
”자유. 정확히 말하면 형벌을 회피할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착각하는 자유’. 우린 주어진 형벌을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게 시시포스 보다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네가 일이 너무 힘들어서 퇴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퇴사라는 하나의 결정 뒤에는 수많은 물음이 바로 뒤따라 붙을 거야. ‘퇴사하고 어디로 이직해야 하지? 이직을 위해 지금부터 무엇을 준비해야 하지? 만약 이직이 생각만큼 잘 진행 안 되면 그동안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지? 아직 퇴사하기엔 준비가 덜 된 것은 아닐까? 그냥 조금만 더 버텨 볼까? 등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실제로 그 상황을 맞닥뜨리면 가능성의 가능성의 가능성… 즉 자유의 그림자에 먹혀버리게 될 거야. 반대로 시시포스의 형벌은 어때 “
“형벌을 회피할 자유가 없으니… 모순적으로 오히려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내가 찾은 답은 그저 몰두하기야.”
-K와의 대화 중
브런치스토리에 남긴 글처럼, 삶과 죽음은 인간에게 필연적이고 그 과정은 불확실함의 연속이다. 불확실한 선택을 위한 자유의지 맞은편에는 언제나 배제된 채 남아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그 말은 곧 내가 하는 모든 선택을 위한 펜촉 끝에는 자유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그의 대표적인 아포리즘-
불안은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 같다. 나는 그와 같은 실존주의 경지에 이르진 못 했지만 어찌어찌 통제할 수 있는 불안과 두려움은 얼마든지 니체처럼 해결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다만 나를 어렵게 하는 것은 통제가 불가능한 불안이었다. 후자의 불안을 대할 때면 막연함만이 가득했고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에 몰두하기였을 뿐이었다.
무엇인가에 몰두를 하면 그 시간 동안 나는 특정 행동을 하는 사람만이 되어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원하는 미래를 이뤄내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것에 몰두를 하면 그때만큼은 어떤 소음도 마음에 가닿지 않았다. 그렇게 공부, 운동, 독서, 영상 편집, 팟캐스트 녹음, 글쓰기와 같이 언제나 내가 몰두해서 집중할 수 있는 것을 해왔다. 그래서 나는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살아가는 세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은 내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열정과는 다른 방향으로 열심히 한 것뿐이어서 한때는 그런 식으로 나를 생각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부끄럽지는 않았다. 내가 몰두를 하며 살아가면 언제나 그 방향으로 좋은 사람들이 같이 걸어가고 있었기에...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나는 불안을 견뎌내기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깨닫는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불안의 본질은 여전히 모르지만 앞으로도 무엇이든 몰두하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