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에 대한 또하나의 생각
동창회는 안 갈 거지만 근황이 유독 궁금한 한 아이가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전학을 온 여자애인데, 전학을 오자마자 전따인 나를 챙겨준 여자애이다. 그 여자애는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 동네에서 꽤 괜찮은 아파트에 살았던 그 아이는 나에게 맛있는 식사와 간식을 챙겨주었다. 다 먹은 뒤에 또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나에게 인형 놀이를 같이 하자고 했다. 나는 정말로 처음 느껴보는 환대에 기분도 좋았다. 나는 그 아이와 많은 대화를 하고 잘 통하는 것도 많다고 느꼈었다.
그 애는 꾸미는 것에 관심을 갖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장을 잘 못했지만, 잘나가는 애들이 비싼 화장품을 써보고 싶다며 그 애에게 화장을 해주었다. 잘나가는 애들과 화장품을 돌려쓰고 그 애는 무리의 중심이 되었다. 잘나가는 무리의 중심이 되자 나와는 소원해졌다. 더 이상 집에 초대하거나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그 애의 집이 아주 크고 인형이나 장난감은 벽을 가득 메웠다. 그 애 집에 놀러 가면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질이 좋고 담백한 요리가 일품이었다. 부모님이 좋은 회사에 다니는 듯 해 보였으나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애는 조금 통통하여 근력이 셌다. 여자 씨름으로 우리 학교 대표였고, 어지간한 남자애들을 팔씨름으로 이겼다. 그 애는 존재감이 컸다. 다른 잘나가는 여자애들은 여리여리하지만, 그 애는 힘도 좋아 행동 대장 격이었다. 그냥 체육 관련된 모든 것은 다 그 애의 독무대라고 보면 되었다. 나는 달리기와 줄넘기만 겨우 평균에 그치고, 그림과 공부만 잘했다.
그러다가 그 애가 예전 학교에서는 왕따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애는 아무 대응도 안 하고 웃었다. 그런 말을 퍼뜨리는 애들을 그냥 뒷골목으로 따로 불러내어 이야기만 조금 했을 뿐이었다. 따로 불러내 폭행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야기는 조용해졌다.
그런 그 애가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다. 바로 남자애들이 코끼리 같다고 놀리며 몸집이나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강해 보였지만 그 말 한마디에 울어버릴 만큼 여린 아이였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다른 여자애들이면 잡으러 뛰어가거나 한 대 날릴 텐데 그 애는 눈물이 났나 보다.
아이들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다른 아이를 조롱하기 위해서 뭔가를 찾는 존재들이다. 잘나가는 그 애가 대상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모든 아이는 누군가의 타겟이 될 수 있고, 그 타겟이 되는 순간에는 인간이 얼마나 강하든 약하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어진다. 누구보다 강한 아이도 순식간에 약해지고, 누구보다 약한 아이도 정치질로 인해 순식간에 강해진다.
왕따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도, 그 애가 눈물을 보이고 나서도 여전히 그 애는 중심에 있었다. 왜 왕따가 되었는지도 알겠고, 왜 잘나가는 아이가 되었는지도 알겠다. 눈에 띄는 존재를 견디기 힘든 학교의 분위기상 그렇게 됐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 애는 인형이 아주 많았다. 벽 한 칸이 책장으로 되어있고, 그 책장을 다 메울 정도의 양이었다. 왠지 잘 사는 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 많은 것을 혼자 가지고 놀았던 시간이 많았다고 생각하니 뭔가 그 애도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떠올리면 또래보다 유아적인 면도 있었던 것 같았다. 강인한 신체와 유아적인 내면을 가져서 나에게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왕따들은 내가 이렇게 계속 왕따였으니 앞으로도 쭈욱 왕따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정체성은 충분히 재설정 가능하다. 사람의 이미지나 정체성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닌 유동적인 것이다. 충분히 환경에 따라 재정의 가능하다.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 따른 사회적 존재이며, 그 시선은 집단의 분위기와 맥락에 따라 변화 가능하다.
사회적 기준이 바뀌기도 한다. 덩치가 크다고 힘이 세다고 코끼리 같다고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다가 그냥 기강 잡고 체육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소외가 없어지기도 한다. 또한 외적인 매력을 갈고닦는 것도 추천한다. 뭔가를 잘하면 주목을 받는다. 그러니 뭐든지 해보길 바란다.
또한 왕따를 당한 소문이 퍼졌다고 잘나가는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은 애를 보면서 느낀 점은 과거의 낙인이 현재의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은 과거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현재의 이미지가 어떤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예전에 왕따였던 인물이 커서도 반드시 왕따이지는 않다.
과거의 낙인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이 사람의 가능성과 미래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변화는 작은 노력과 선택에서 시작되며, 주변의 시선도 점차 달라진다. 결국 우리는 과거의 그림자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이는 단지 개인의 성장뿐 아니라, 사회가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조금씩 유연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나는 이걸 너무 늦게 알았다. 과거의 상처와 낙인이 너의 미래를, 정체성을 결정하게 두지 말아야 힌다는것. 스스로를 믿고 변화할 용기를 가지라는 것. 왕따를 당한 이들은 지나치게 움츠러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괴롭힘이 인생의 일부이지 전부는 아니다. 피해자로 지목되고, 많은 가스라이팅을 당할 텐데 타인이 정의한 게으른 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조금 더 능동적으로 되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