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나는 왕따를 당했다
나는 양말을 신지 않고 학교에 가곤 했다. 발에 땀이 차면 답답해서 실내화를 벗어버렸다. 일주일에 몇 번 목욕했을까? 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나는 목욕하지 않고 양말도 신지 않는 그런 아이였다. 엄마나 아빠는 맞벌이라서 그런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퇴근 후에도 나보다는 티비가 우선이었다. 또한 할머니도 우리 집에서 고물을 모아 돈을 모으고 있었다. 엄마가 고물 좀 모으지 말라고 50만 원을 드려도 그대로였다.
내가 냄새가 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게 뭐 대수라고 생각해 그냥 씻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사이에 왕따가 되었다. 다른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으면 왕따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친한 애들도 어떻게 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냄새가 나는데, 씻지 않는데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아이들은 내 곁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가난의 냄새. 쓰레기 냄새. 그냥 그것이 내 평가였다. 쓰레기 더미로 뒤덮인 내 집은 아이들이 와서 자기들끼리 경험담을 푸는 장소였다.
“오늘 걔네 집에 갔는데 진짜 더러운 곳에 살고 있더라.”
“걔는 어떻게 그런 집에서 살지?”
누군가는 코를 막았고, 누군가는 일부러 내 옆 창문을 활짝 열기도 했다. 어떤 애는 양말을 건네며 좀 신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 있으면 그날 하루는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잘 씻지 않았다. 왜 씻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처음에는 창피함보다도 화가 났다. 냄새가 난다고 사람을 저렇게 무시해도 되나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서는 화보다는 부끄러움이 더 커졌다. 점심시간에는 선생님이 지어준 조에서 밥을 먹고, 체육 시간에는 짝이 없어서 그냥 선생님과 하거나 선생님이 짝지어 준 애랑 했다. 그럴 때도 짝지어 준 애는 울거나 밥 먹을 조를 짜주면 다른 애들은 찡그리기도 했다.
나는 점점 나 자신이 냄새로만 기억되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 나는 자주 코피를 흘려 이비인후과에서 코를 지지기도 했다. 코를 지질 때 오징어 냄새가 나고, 민트향 나는 무언가를 발라서 마무리했다. 그 뒤로는 코피가 나지 않았지만, 코가 아파질 때까지 나는 공부를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성적이 정말 좋았다.
정말 방치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다른 아이들이 가슴이 나왔을 때였다. 나도 그때쯤에 가슴이 나왔는데, 다른 아이들은 자기에게 맞는 브래지어가 있었다. 나는 가슴이 나왔을 때 내 브래지어가 없었다.
씻지 않은 아이가 씻게 된 계기는 정말 단순했다. 자연스레 시간이 지나면서 꾸미는 것에 관심 있게 되고 씻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기억난다. 냄새가 난다며 손사래 치던 얼굴들, 화가 난 듯이 확 열어젖힌 창문들. 그리고 아무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순간들. 하지만 나는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냄새나는 아이는 부모님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방치되었던 기억들.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때는.
어린애들은 왕따를 시킬 때 외형적인 것도 보지만, 누가 이 아이를 보살피지 않는지도 보는 것 같다. 나는 아이를 가진다면 내 밥벌이를 하기보다는 아이가 뭘 말하는지 듣고 싶다. 부모님의 방치는 가끔 불쑥불쑥 떠오른다. 야무지게 내가 나를 방어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갑작스레 떠오르고는 한다.
왕따를 시키면 안 된다는 고루한 말은 여기서 하고 싶지 않다. 그들도 내가 싫었을 수 있으니까, 내가 그들을 싫어했던 것만큼. 결국은 나는 냄새 나는 아이였고, 그들은 냄새나는 아이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단순한 혐오와 배척 속에서도 나의 잘못이 섞여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이 내게 남긴 상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여전히 그 기억 위에서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