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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피의 바다는 언제나 푸르다

Raoul Dufy. 덕질로 세상을 톤업하는 법

by 한이람




겨울이면 바다가 그리워진다.



"Sea is the warmest answer, always." by Claire. H.



물멍이 필요해질 때가 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질 때. 그럴 때 나는 한강공원에 간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평평한 물을 보러. 물을 보다 보면 수평선이 생각을 조용히 밀어내고, 고민도 납작하게 눌러준다.


그런데 강으로 안 되는 날이 있다.

그럴 때는 바다가 필요하다.


계절의 색이 바뀌는 지금 같은 때는 더.


멀어진 색들을 다시 눈에 담고 싶어서일까?

유리 조각처럼 빛나는 초록과 파랑.

겨울엔 왠지 그런 색들이 보고 싶어지니까.



그 색의 물결을 캔버스에 올린 화가가 있다.

사랑하는 바다의 색을 정확하게 담아낸 사람.



이건 라울 뒤피에 대한 이야기다.




색으로 부서지는 여름의 바다

La Visite de l'escadre anglaise au Havre (1928) by Raoul Dufy


바다와 떨어진 곳, 눈부신 물결의 움직임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곳에서 산다는 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호수 정도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Raoul Dufy


라울 뒤피.

바다 덕후.. 아니, 바다의 화가라고 불린 사람.


뒤피의 바다는 소금 대신 파스텔 빛 설탕을 한 스푼 녹인 여름의 색이다. 바람이 색을 밀고, 그 뒤로 가는 선들이 노래하듯 달린다. 하얀 돛은 종이비행기처럼 수면 위를 날아다닌다.


그는 프랑스 남부, 니스와 뱅(Vence), 앙티브 같은 반짝이는 도시의 바다를 그렸다. 그 바다에는 파라솔과 요트, 사람들이 있다. 해변이 보이는 카페의 찻잔, 창틀 너머 꽃병, 그런 여름 조각들과 함께. 유화물감을 써도, 과슈(Gouache)를 써도 언제나 수채화처럼 맑고 선명한 물색. 그의 바다는 늘 가볍고, 즐겁고, 반짝거린다.


햇빛이 수면 위로 부서지는 소리를 옮긴 걸까?

쨍한 선과 선, 면과 면이 만나 찰칵—

플래시가 터지듯 경쾌하게 펼쳐진다.


뒤피의 선은 리듬을 싣고 움직인다.

경쾌한 파도 소리처럼. 바캉스의 바람처럼.


그의 바다에선 색이 선율이 된다.

재즈처럼 자유롭게, 여름 햇살처럼 반짝이면서.




귀여움이 세상을 구하는 이유

Regates a Cowes (1934) by Raoul Dufy


내 눈은 추한 것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Raoul Dufy


뒤피의 바다는 해맑고 달콤하다.

사탕으로 만든 선글라스를 끼고 본 것처럼.


내가 귀여운 걸 유난히 좋아해서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봐도 취향저격인 바다다. 뒤피가 사랑스러운 바다를 그릴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성격이 낙천적이라서만은 아니었다. 진짜 비결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었다. 좋아하는 걸 오래, 예쁘게 바라볼 줄 아는 눈.


미국의 심리학자 바버라 프레드릭슨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기쁨, 설렘 같은 긍정적 감정은 사고 범위를 확장시키고 창의력, 회복탄력성 같은 심리 자원을 쌓게 한다고. 이게 확장 및 구축 이론(Broaden-and-Build Theory)이다.


결국 좋아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마음을 튼튼하게 만드는 가장 무해한 방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귀여운 걸 보고 싶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귀여운 건 누구나 좋아하고, 좋아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 은근 과학적이다.


요약하면,

좋은 기분이 오래가면 뇌가 튼튼해진다.
그리고 잘 만든다.


라울 뒤피의 집엔 늘 좋은 기분이 흐르고 있었다. 돈은 없었지만 웃음과 음악은 넘쳐났고, 아버지는 오르간을 연주하며 아이들에게 음악의 기쁨을 전해주었다.


Harbor, c. 1920 by Jean Dufy


그의 동생 장 뒤피(Jean Dufy)도 화가였다.


두 형제의 그림은 많이 닮았지만, 확실히 다르다. 라울이 재즈라면 장은 실내악 같다. 우유 한 방울을 톡 떨어뜨린 듯, 아이스크림 같은 색감. 같은 바다를 그려도 라울의 바다는 경쾌하고, 장의 바다는 잔잔하고 부드럽다. 형제는 서로 다른 감성으로 같은 세계를 그렸다. 청량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만들어낸 하모니였다.


라울 뒤피는 그런 정서적 자양분 안에서 자랐다. 음악을 사랑했고, 예술을 사랑했던 가족. 물감보다 웃음이 먼저였던 집. 그는 그 사랑을 캔버스 위로 옮긴 사람이다.


Paysage en Normandie ou Le Poirier (1930) by Raoul Dufy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마치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 같다고.

모든 게 놀라움으로 포장된 선물 같던 순간들.


그의 캔버스엔 우리가 여전히 믿고 싶은,

반짝이는 세계가 남아 있다.




최애 큐레이터로 산다는 것

En honor a Claude Debussy (1952) by Raoul Dufy


나를 키운 것은 음악과 바다였다.
-Raoul Dufy


사랑은 나눠도 줄지 않는다. 오히려 커진다.

덕질은 증식형이니까.


라울 뒤피는 그런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걸 덕질하다가, 나누고 싶어지는 사람.


바흐, 드뷔시, 모차르트, 쇼팽.

그는 선율을 눈으로 그리는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음악가들의 이름을, 색과 선으로 불렀다. 그의 예술도 하나의 장르에 머물지 않았다. 회화, 삽화, 텍스타일 디자인, 가구 디자인... 화풍도 인상파와 입체파, 야수파를 넘나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예술가이자 큐레이터였다.

존경과 애정을 큐레이션한 예술가.

좋아하는 걸 수집하다, 그게 다 그림이 된 사람.


La Fée Electricité (1937) by Raoul Dufy


《전기의 요정(La Fée Electricité)》은 기술의 진보와 발명에 대한 낙관을 담은 작품이다. 그에게 세상을 구성하는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자 창조의 동기였다. 그의 캔버스엔 사랑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삶을 더 멋지게 만들어주는 것들’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그림으로 헌정한 화가. 그래서 그의 그림은 우릴 긴장하게 하지 않는다. 선은 단순하고, 색면 분할은 가볍다. 그 선들은 애정 어린 응시 같기도 하고, 마음속의 작은 기쁨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슬픔도 예술인데,
왜 그는 늘 밝은 그림만 그렸을까?


Intérieur à la fenêtre ouverte (1928) by Raoul Dufy


어쩌면 그에 대한 이야기가 긍정 이데올로기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밝음은 외면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버티기 위해 선택한 시선, 애써 지킨 다정함이었다.


그는 삶이 무겁다는 걸 너무 잘 알았기에 사랑할 것들을 찾았던 사람이었다. 14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가족을 위해 일을 했고, 돈을 모아 야간 학교를 다니며 미술을 공부했다. 전쟁과 대공황의 시대에도 그는 파란 바다를 그렸다.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밝은 바다를 그린 사람.


그는 험난한 세상 안에서 사랑할 것들을 더 발견하고, 더 바라봤다. 좋아하는 걸 나누고 싶어 했고, 믿고 싶은 걸 그렸다. 그의 바다는 도피가 아니라 응시였다. 현실의 잔혹함 너머를 바라보는 눈. 그 응시는 세상을 버티기 위한 다정한 방식이었다.


그의 바다는 그가 보고 싶었던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을 끝까지 붙잡으려 한 사람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La Vie en Rose (1931) by Raoul Dufy



삶은 나에게 미소 짓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지었다.
-Raoul Dufy


어떤 사람들은 사랑받고 자라서 세상을 쉽게, 또 즐겁게 사랑한다. 삶 곳곳에서 ‘내가 좋아할 것’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눈. 그걸 오래 지켜낼 수 있는 에너지. 바라는 것 없이 퍼주고 싶은 마음.


그래서 덕질도 재능이다. 웃음소리에 둘러싸여 자란 뒤피는 그런 재능을 타고났을지 모른다. 운이 좋은 거다. 태어난 환경은 선택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뒤피만큼 자주는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무언가에 빠진다. 웃음보단 정적이 많았던 집에서 자랐지만 나도 그랬다. 고3 때 『스푸트니크의 연인』으로 하루키에 입덕해 수능특강보다 하루키를 더 봤고, 대학생 때는 진격의 거인전 보겠다고 자체 휴강하고 일본까지 갔으니까.


쓰고 보니 별로 바람직한 예시는 아니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걸 통해, 세상이 갑자기 재배열되는 순간이 있다.


어떤 취향은 따라 하다가 내 것이 되고,

우연히 집은 책 한 권이 인생을 뒤흔들고,

덕질메이트가 평생의 친구가 되기도 한다.


좋아함이 가진 추진력은 늘 예상을 넘긴다.

정신차려 보면, 완전 뜻밖의 챕터에 가 있으니까.



Nice, Baie Des Anges' (1927) by Raoul Dufy



Don't pointless things have a place, too,
in this far-from-perfect world?

이렇게 불완전한 세상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머물 자리쯤은 있지 않을까?
-Haruki Murakami,
『Sputnik Sweetheart』



나는 뒤피처럼 타고난 덕후는 아니다.

쉽게 빠지지도 못하고, 금방 질린다.


대신 좋아하는 걸 더 자주 찾고,

조금 더 길게 보며 그를 따라 해 본다.

그의 바다도 그중 하나였다.



그렇게 무언가에 빠지면,

세상이 어느 순간 톤업된다.

뒤피의 바다가 늘 파랗던 것처럼.


그리고 내 세계도 다시 맞춰진다.

아주 작은 물결에서 시작해,

저 멀리 수평선까지 번지는 기적.


그러다 보면 우리는 조금씩,

각자의 속도로 세상을 좋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건 라울 뒤피의 이야기이자,

사실은 그를 통해 내가,

세상을 더 좋아하는 법을 배우게 된 이야기다.





心臓を捧げよ!(심장을 바쳐라!)❤️‍⚔️ 여러분의 하루키와 리바이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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