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 Chagall. 뮤즈, 짝사랑, 예술의 삼단논법
난 지금 음악을 듣고 있다.
글을 쓰면서.
어쩌라고 싶겠지만 드문 일이다. 난 글을 쓸 때 가사 있는 노래를 잘 안 튼다. 가사가 생각의 흐름을 자를 때가 있어서.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르다. 남편이 노래를 틀었는데 꺼달라고 하려다 멈췄다.
10년도 더 된 애를 사랑할 수 있냬
이제 그만 잊으래 근데 그게 잘 안돼
오랜만이다 빅나티. 남편이 중학교를 캐나다에서 나왔는데, 그래서 자기는 Vancouver라는 노래가 좋다고 한동안 자주 들었다.(이게 뭔 상관인지?) 나도 그 노래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 이 노래는 도저히 공감이 안 된다. 10년 넘게 짝사랑을 한다니.
"정이래."
정이라고?
아... 노래 제목이 "정이라고 하자"라고.
(빅나티가 이 글을 볼 일은 없겠지만) 미안한데 정 같지는 않은데. 누가 들어도 사랑이잖아.
아니 10년 넘게 짝사랑하는 게 가능하긴 해?
오늘은 샤갈을 소환했다.
난 왜 갑자기 이 사람이 생각난 걸까.
염소로도 유명하지만, 샤갈은 무엇보다 색으로 기억되는 화가다. 미술사에 있어 색의 마법사 같은 존재.
르누아르 이후 빛을 가장 잘 다룬 화가.
마티스 이후 색을 이해한 유일한 화가.
샤갈을 두고 피카소가 한 말이다.
르누아르만큼 빛을,
마티스만큼 색을 사랑했던 사람.
빅나티의 노래를 듣다가 나는 샤갈이 떠올랐다.
아니, 정확하게는 샤갈의 그녀가.
이 그림엔 샤갈 특유의 색과 질감이 폭발한다. 염소털... 아니 양털처럼 몽글몽글한 터치, 사탕껍질 같이 달콤한 색들이 캔버스 위를 어지럽게 떠다닌다. 알록달록한 마시멜로 같다고 할까. 붓터치 사이사이 솜사탕이 녹아 있는 것 같은, 막 사랑에 빠졌을 때의 설레고도 벅찬 감정이 색으로 번져 있다.
1909년. 보석상 딸과 가난한 화가 지망생의 사랑이 시작됐다. 35년간 그 사랑은 샤갈의 붓끝에 남았다. 1915년, 결혼 후 그린 ‘생일(Birthday)’을 시작으로 벨라는 평생 그의 미술 세계에 머물게 된다.
그녀의 침묵, 그녀의 눈은 내 것이다.
그녀는 내 과거, 현재, 미래를 알고 있는 듯
마치 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듯하다.
-Marc Chagall
뮤즈.
벨라는 샤갈의 영원한 뮤즈였다.
창작, 특히 예술은 감정에서 출발할 때가 많다. 감정은 예술의 도화선이자 연료다. 그림이나 시처럼 감정을 품는 창작물은 감정이 터진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중 사랑은 가장 강력한 연료다. 왜냐고? 사랑은 감정의 종합선물세트니까. 설렘, 동경, 긴장, 질투, 집착, 우울, 희망까지. 감정의 다발이자 시한폭탄.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예술가들은 그걸 붙잡으려 붓을 든다. 누군가는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마이크를 든다.
심리학자 제임스 그로스의 감정 조절 이론에 따르면, 감정은 표현을 통해 조절할 수 있다. 감정이 너무 커서 감당이 안 될 때, 우린 본능적으로 그것을 밖으로 빼내려 한다.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랑에 빠졌을 때, 짝사랑하거나 이별했을 때 우리는 왜 그렇게 노래를 찾게 될까?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을 노래가 담아주는 순간, 그것은 감정의 소비가 아니라 조율이 된다. 이 조율의 연장선에서 예술도 시작된다. 가사든, 붓질이든.
그런데 문제는—사랑은 오래가지 않는다. 원한다고 오래 머물러주지 않는다. 영원한 건 절대 없으니까. 그래서 예술가들은 이 훌륭한 연료가 빨리 타버리지 않도록, 감정을 오래 붙드는 공식을 찾았다.
뮤즈로.
샤갈은 벨라를 평생 그렸다. 사별 후에도, 심지어 재혼한 뒤에도(이건 좀)— 한동안 계속. 지속가능한 사랑... 아니 거의 종신계약 느낌으로. 빅나티도 그랬다. 그녀가 좋아한 프랭크 오션을 노래 제목으로 붙이고, 로맨스보다 코미디를 좋아하던 남자가 타이타닉을 보며 울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그녀들이 뮤즈였기 때문이다.
뮤즈는 지속가능한 사랑의 이름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걸 짝사랑이 설명해 준다. 짝사랑은 결여의 자각을 불러온다.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비추며. 동경과 초라함, 자격지심을 꺼내게 한다. 감정의 1인극. 무대도 혼자 만들고 대사도 혼자 쓴다. 왜 그 사람이었을까를 묻다가 결국, ‘미친... 나 왜 이렇게 됐지?’까지 가버린다.
단순히 마음이 복잡해서가 아니다. 몸도 뇌도 복잡하게 움직여서다. 생리심리학적으로 짝사랑은 이상한 상태다. 사랑할 때처럼 옥시토신이 분비되지만, 스트레스 호르몬인 노르아드레날린도 함께 분비된다. 사랑과 고통의 신경회로가 동시에 켜지는 셈이다. 그래서 오래간다. 이루지 못한 건 쉽게 사그라들지 못하니까.
여기서 이상화(idealization)가 작동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주의를 그 사람에게 계속 머무르게 하고, 인지적 재구성을 통해 그 감정을 "더 가치 있게",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포장한다.
그럼 뮤즈가 꼭 짝사랑이어야 할까? 샤갈을 보면 그렇진 않다. 그는 벨라와 함께한 시간 동안에도 늘 그녀를 그렸다.
결여에서 생긴 이상화는 갈망이지만,
충족된 사랑에서의 이상화는 기억의 포장이다.
사랑은 지나가지만,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싶은 감정이기도 하니까. 벨라의 목소리, 눈빛, 존재 그 자체를 샤갈은 물감으로 번역했다. 짝사랑이든 현실 연애든, 이 감정을 계속 붙잡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 그건 예술의 시작이 된다. 뮤즈는 사랑을 오래 재생하는 장치고, 이상화는 감정의 포토샵이다.
결국 짝사랑-뮤즈-예술은 하나의 구조다.
갈망에서 시작되든, 기억에서 시작되든,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붙들고 싶은 마음이
예술을 만든다.
우리 인생에는 화가의 팔레트에 놓인 것 같이,
삶과 예술의 의미를 보여주는 색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색입니다.
-Marc Chagall
샤갈 하면 뭐가 떠오르시는지?
난 염소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바이올린, 수탉, 신부. 샤갈 그림엔 늘 그런 상징이 있다. 딱 보면 아, 샤갈이구나 싶은 것들. 그 세계는 고향 러시아에서 왔다. 샤갈은 하시디즘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람과 동물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관. 샤갈이 평생 동물을 그린 것도 그런 믿음 때문이었다.
그가 색에 눈뜨게 된 건 20대 때 파리로 가면서부터다. 그곳에서 그는 화가들과, 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때 인상파와 야수파의 영향으로 작품의 색채가 밝아지고 자유로워진다. 친분이 두터웠던 입체파의 영향도 받았지만 끝까지 색채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는 색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의 색은 오래가지 못했다. 2차 대전을 앞두고 유대인 학살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면서. 또 1945년, 벨라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샤갈은 1년간 붓을 들지 못했다. 모든 색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그렸다. 벨라를.
그건 기억을 위한 그림이었다.
글이 정말 안 써질 때가 있다. 안 쓰면 되지 않냐고? 말이 쉽지 그럴 땐 이상하게 다른 것도 안 된다. 내 안의 무언가가 툭하고 끊긴 느낌. 우린 그걸 슬럼프, 혹은 번아웃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실, 그건 잘못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신호다. 감정과 생각을 다루는 사람들—작가나 예술가처럼 깊이 생각하고, 감정을 밖으로 꺼내는 사람들은 종종 멈추고 흔들린다. 번아웃은 그 깊이에서 잠깐 피어오른 거품이다. 냄비가 끓어 넘치기 직전 뚜껑을 여는 타이밍. 브레이크나 과열 방지장치같이.
슬럼프는 고장이 아니라 질문이다. 당신은 왜 이걸 시작했나요?라는 기억의 물음표. 샤갈에겐 그게 벨라였다. 그녀가 그의 세계를 지켰고, 그의 붓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당신에게도 그런 뮤즈가 있다면 그건 불씨이자 배다. 창작을 시작하게 한 영감이면서, 다시 건너갈 수 있게 해주는 기억의 배. 아이돌이든, 제인 오스틴이든, 우리 집 강아지 빼꼼이든. 지금 떠오르는 게 있다면 당신에겐 뮤즈가 있다.
짝사랑 중이라고? 더 좋다.
짝사랑은 꽤 오래 타는 연료니까.
애틋하거나, 복잡하거나,
자꾸만 신경 쓰이는 뭔가가 있다면—
곧 염소가 튀어나오고,
노래가사가 흘러나올 거다.
우리는 삶에 친숙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데 친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짧고, 사랑은 간다. 아마도.
그래도 예술은 남는다.
가끔 너무 벅차서, 때론 공허하거나 멀어져서
예술가들은 무언가를 만든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혹은 잊기 싫은 게 있다면—그게 당신의 뮤즈다.
그런 게 있다면 뭐든 남겨보면 어떨까?
글이든 그림이든, 가사 한 줄이든.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미 예술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차트 탑 100이나 부커상까진 아니라도 요즘 뜨는 브런치북... 아니 브런치 메인 정도는 노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더 운이 좋으면,
짝사랑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공연 중에 뽀뽀해서 혼났던 이 남자처럼.
(끝!)
스트레스 해소법 공유해 주세요!
저는 혼자 한강공원 가서 라면 먹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