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재능 #1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진로가 어느 정도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이다. 그때의 나는 여느 또래 친구들처럼 수많은 사교육을 경험했고, 그중 예체능에, 미술에 소질이 있는 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공으로 선택할 만큼 좋아하고 꽤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림보다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었다. "우와!" "오, 잘하네!" "그림 좀 그리네" 그냥 그런 말들이 좋았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버린 시점은 본격적으로 입시 미술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입시 미술의 세계에선 내가 그리던 그림과 많이 달랐다. 더 이상 좋아하는 그림만 그릴 수도 없고, 내킬 때만 그리지도 못하고, 가장 중요한 시간제한 있었다.
살던 동네나 공부만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나의 그림 실력이 꽤 괜찮다고만 생각했는데, 더 큰 학원에 가보니 훨씬 더 재능 있고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보이게 되었다. 좌절도 많이 느꼈다. 내가 생각만큼 잘 그리는 편은 아니었구나, 노력한다고 저 타고난 재능은 따라잡기 어렵겠구나 자주 느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쭉 그렸는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좋은 평가를 받는 친구들도 보면서, 슬프게도 그린 시간만큼 실력이 꼭 비례하진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잘난 친구들과 넓은 곳에서 비교와 경쟁을 해야 하는데, 더 이상 인정을 받거나 칭찬을 받지도 못하고. 그림을 잘 그리지 않게 된 나는 그림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고, 무엇보다 꼭 미대를 가야 한다는 목표나 동기가 없었다.
그림을 그릴수록 나의 애매한 재능을 느꼈고, 내가 다시 잘 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 진학에 대한 간절함과 노력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내가 정말 그림을 정말 좋아하는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시작했고, 아무 생각 없이 손잡고 따라갔던 수많은 미술관과 예술 작품 속에서 아무것도 하품만 했던 내가 떠올랐다. 수많은 미술 작품을 보아도 지루하기만 하고, 심오한 예술의 세계에서 나는 도대체 뭘 느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아쉽게도 내가 미술을 좋아하는 이유는 잘 그리는 줄 알아서였는데, 나의 재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흥미도 잃었다.
예체능 특히 미대를 준비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재료비 장비부터 학원비까지 돈이 꽤 든다. 오랜 시간 그렸고 준비하는 비용이 한두 푼이 아니라서 애매한 내 재능에 귀한 돈과 시간을 배팅하기엔 부담스럽고 아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냥 놓기엔 가족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지지와 함께 좋은 학교의 간판을 얻는 게 현실적인 목표였고, 입시를 하면서 여유롭게 진로 선택을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기도 하고.
어쨌든 대학을 가려면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나에게 미술은 아니라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긴 시간을 버텨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하게도 그 많은 학교 중에 단 한 곳도 붙지 못했다.
그동안 오랜 기간 내가 쏟아부어왔던 시간, 노력, 감정, 돈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