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 1학년9반. 제2의 '나훈아'를 꿈꾸며.
"대상! 무한궤도, <그대에게>!"
1988년. 어느 날, 아버지가 틀어두신 TV에서 처음 '대학가요제'라는 걸 보게 됐다. 누나들과 뭣도 모른 채 누가 1등이 될런지 서로 자기 예기만 조잘거리던 와중이었다.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웅장한 사운드, 압도적인 무대, 그리고 신해철.
그 순간부터였다. 내 안에 '해철 형님 앓이'가 시작된 건.
아버지도 감탄하셨다. "아무렴, 저 친구들이 받아야지. 때거지로 나와서 저렇게 장비도 많이 챙겨 왔는데, 그 정성만 봐도 되겠더라니."
그날 이후, 나도 언젠가 저 무대에 서고 싶다고 생각했다. 꿈은 그렇게 조용히 자리잡게 되었고, 내 안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마침내, 고3. 수능을 눈앞에 둔 어느 날, 그 꿈이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나, 가수 하고 싶어. 가수가 될래."
엄마는 한참 말을 잇지 못하셨다. 장난인 줄 아셨던 건지, 아니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으셨던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 대학 가서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하지만 그때의 나는 대학보다 무대가 더 중요했다.
계획도 실력도 없었지만, 마음만은 이미 무대 위에 올라 있었다. 공부는 뒷전이었고 헛짓을 하고 다니던 중 그런 나의 모습을 보신 아버지께서 어느 날 물으셨다.
"너 요즘 공부 안 하고 뭐 하고 다니는 거냐?" "아버지... 저, 가수 할래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이 번쩍였다. 어릴 적 잠결에 요강단지를 아버지 바지에 엎은 사건 이후 처음 맞아본 아버지의 손길이었다. 아프기보다 억울했다.
꿈 많은 열아홉, 간절한 마음을 고백한 것이 왜 죄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고 싶으면 대학 가서 해. 대학에서 해!" 그 말에 '대학가요제'가 떠올랐다.
그래, 해철 형님도 명문대를 나왔지. 나도 그 길을 따라가자.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명문대는커녕, 진학 자체가 버거운 형편이었다.(2학년 3반 에피소드 참고)
그래도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재수하던 시절, 아무도 모르게 오디션용 테이프를 만들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에 영상을 올려 오디션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아버지가 영어 공부하신다고 사두셨던 낡은 카세트에 내 노래를 녹음했다. 외국인의 꼬부라진 목소리 위로 내 생목소리가 더해진, 묘한 조합.
그 테이프를 포장해 기획사에 소포로 보냈다. 물론, 연락이 올리 만무하잖은가.
그럼에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노래방을 전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무대를 꿈꿨다.
그렇게 한때의 열병으로만 남을 줄 알았던 그 꿈은 첫 직장에서 나와 같은 꿈을 품은 선배를 만나며 다시 살아났다. 함께 사회인 밴드를 결성했고, 드디어 클럽 무대에 섰다. 아마추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 프로 가수였다.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 관객들의 환호. 그 감동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 속에 살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 역시 젊은 시절, 가수가 되고 싶으셨다는 것.
하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 꿈을 접고 묵묵히 가장으로 살아오셨다고 한다.
어느 부모가 가수라는 험난한 가시밭길을 선뜻 응원할 수 있었겠는가. 그 시절, 아버지의 마음속에도 아쉬움이 없었을 리 없다.
지금도 라디오에서 <그대에게>가 흐르면 그날의 열한 살 소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아버지가 떠오른다.
그 노래의 웅장함과 아버지의 깊은 마음이 내 마음 한구석을 여전히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는 자식들 모두 출가시킨 뒤, 엄마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싱글 앨범을 내셨다.
<쉼표 없는 세월>이라는 노래로 가수협회에 등록된, 진짜 가수가 되셨다.
'아버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그 길을 저도 따라가려 합니다. 비록 저도 늦어질지 몰라도, 때론 늦었다고 생각되어질 그때가 가장 빠른 출발점일지도 모르니까요.'
꿈은 꿀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꼭 이루지 못해도, 그 상상과 설렘만으로도
인생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준다.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나도 언젠가, 아버지처럼 은퇴 후에 앨범을 내고
정식 데뷔하여,
제2의 '나훈아'가 되기를.
그때는, 누가 또 말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