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
나는 백반을 사랑한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백반으로 하루 세 끼를 먹어도 좋다"라는 수준이다. 어릴 적, 백반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뜻을 이렇게 이해했다. ‘백(百) 가지 반찬이 나오는 상’이라는 뜻. 상상만으로도 눈이 커졌다. 백 가지가 아니더라도 밥상을 덮을 만큼 쫙 펼쳐진 반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서 밥이 보일까 말까 한 진수성찬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김치, 나물, 어묵볶음, 그리고 그날의 국.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백 가지는커녕 두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써도 모자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백반(白飯)은 그저 ‘하얀 밥’이라는 뜻이라는걸.
흰쌀밥에 국과 반찬을 곁들인 소박한 한 상. 알고 나니 조금 허무했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 백반은 여전히 ‘백 가지 행복’을 품고 있었으니까.
백반이 주는 교훈은 단순한 것 같다. 화려한 주연 하나보다, 서로 다른 조연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조화가 더 맛있다는 것. 삶도 그렇다. 밥 같은 든든함, 국 같은 따뜻함, 그리고 반찬 같은 다양함이 어울려야 비로소 완성된다.
또 한 가지, 백반은 날마다 같아 보여도 조금씩 다르다. 된장찌개의 간이 어제보다 진할 때도 있고, 김치의 익은 정도가 계절에 따라 변한다. 심지어 같은 반찬이라도 만드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똑같아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변주가 존재하고, 그 변주가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
내게 백반은 단순한 한 끼가 아니다. 백 가지 반찬은 없지만, 그 안에서 백 가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한 상이다. 오늘의 반찬이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고, 어제 만난 사람의 표정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국 한 숟갈, 김치 한 젓가락이 마음속 온도를 높여주고, 밥 한 공기가 하루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백반집에 앉아, 하얀 밥 한 숟가락에 반찬을 올리는 상상을 한다. 현실은 아이들의 한상 차림 속에 남은 반찬의 양이 나의 한 끼 식사가 되지만, 그 소박함 속에서 나는 언제나 배부르고, 조금 더 행복해진다.
백반은 결국, ‘백 가지 반찬’이 아니라 ‘백 가지 행복’을 담는 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