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쓸데없고 무용한 시간들을 보내도 이유 있는 고독함이 대수롭지도 않을 무렵
그 여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무려 밤 10시. 용감한 그녀의 행동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다.
나를 만만히 봐서인지 모르겠으나 불편할 것도 없는 모호한 마음이 들었다.
같은 처지나 입장도 아닌데 어쩌면 그 여자에게는 나와 동질감이 느껴지나 보다.
"여보세요"
"늦은 시간이죠?...
전 한 잔 하고 있어요... 혹시 술을 잘하시나요..?
다음엔 같이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어떠세요?"
불쑥 내뱉는 술 한잔의 권유라니 술의 기운은 대단한 용기를 가져다준다.
가득 팽창한 공기를 머금고 있는 풍선이 터지지 않고 무기력하게 바람이 빠지는 기분이다.
가슴이 내려앉지만 그 여자의 음성처럼 나도 주저 않았다.
도발 같지 않고 친근함이 드는 건 같은 여자로서 유대감 따위가 섞인 감정일 거다.
"언젠가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있을 수도요..
지금은 한지은 씨와의 어떤 대화도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견제하는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 수 있죠. 이해해요... 저는 지원 씨가 불편하지가 않아요.
제가 나약해서 대화 상대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게 지원 씨라는 건 저도 믿기 어렵네요.
그래서인지 계속 지원 씨가 생각나고 같이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가까운 사람들과 한 잔 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술을 잘 마시진 못하지만요.
주량이 원래보다 그래도 늘긴 했어요.
꽤나 괴롭고 지친 마음이라 그렇게 되네요.... 늦은 밤에 변명처럼 들리시나요..?
잘 아시겠지만 제 처지가 그래요. 외로움을 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고,
이해심이 유독 깊은 우진 씨에게 의지를 많이 했어요."
내가 그 여자의 존재와 사연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진 씨의 성격 때문이다.
우진 씨는 불 필요한 것들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숨기거나 거짓말에 능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투명함에 가까워서 속이 잘 보이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보여주는 소년미가 있다.
두 사람이 헤어진 시기와 가깝게 날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그가 자연스럽게 본인에 관하여 알려주었을 거라는 확신을 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내가 느끼는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진정성 있게 보이는 것.
그러기에 내가 둘 사이에 자리하게 된 어설픈 인물이 된 것.
내가 현재까지 깨닫는 나의 상황이다.
하루하루 고요하게 지나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물결치듯 일렁거리며 무너지는 우진 씨와의 관계는 불안한 파도 위 작은 돛단배 같다.
그 위에서 나는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난파되지 않으려는 힘없는 선장이다.
이른 퇴근을 하고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밝은 아파트 앞 입구에 눈에 익은 실루엣의 여자가 서 있다.
그 여자가 마치 내가 지금 귀가하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기다리고 서 있다.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요?"
나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여자의 대담함이 너무 궁금하다.
"전화로 연락하거나 문자는 자신이 없어서요.
생각보다 일찍 퇴근하시네요.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온건 아니에요."
한숨부터 나오게 만드는 이 여자의 무모한 행동에 기운이 빠진다.
변명이 아닌 언제나 상세한 설명을 모질게 내뱉는 그 여자다.
"저 쪽으로 가서 잠시 앉으시죠. 편하게 얘기할 만한 자리는 많지 않아요. 놀이터가 가까워서."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치켜떠지는 눈을 거두고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벤치로 갔다.
정면을 응시하게 되는 연인들을 위한 자리인데 예상 밖의 인물과 함께 나란히 앉게 될 줄 몰랐다.
여러 종류의 나무들과 꽃들로 그럴듯한 조경을 해 놓아 둘 의 대화 내용과는 전혀 다른
따뜻한 분위기 속 자리다.
"여긴 어떻게 알고 계신 건지. 제 뒷조사라도 다 하신 것 같네요. 어디 사는지, 어디서 일하는지 모르시는 게 없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아무 때나 불쑥 허락 없이 찾아오는 건 아무 상관없는 건가요?"
당연히 따질 수밖에 없는 제멋대로인 그 여자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아름다운 꽃 밭을 보며 쏘아붙였다.
"진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우진 씨가 지원 씨의 집 앞을 자주 다녔을 테니 지원 씨의 집이 이곳이나
옆 아파트 정도 될 거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와 본 거예요.
우진 씨 핸드폰에 있는 내비게이션 정보를 본 적이 있거든요..
사실 우진 씨와는 계속 싸움으로만 번지고 제대로 된 대화는 불가능해요. 그럴 때마다 지원 씨가 생각나고요.
제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같아서 저도 모르게 지원 씨를 찾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망가진 건지 원래 이렇게 제멋대로 규칙 없는 성격인 건지 우진 씨가 또 한 번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당장 그에게 이렇게 같이 있게 되었다를 알리고 싶어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지만
그럴 수도 없을 만큼 가까이 나란히 앉아 있다.
동네 이웃 인 친한 언니가 나를 발견해
"지원아 안녕? 뭐 해~ 아 친구 만나는구나? 또 봐~"
해맑게 아는 척을 하며 지나간다.
첩첩산중이다. 반갑게 인사할 겨를 없이 손을 들어 힘없이 흔들어주고 말았다.
내 주변의 작은 소소한 것들까지 뜻하지 않게 이 여자에게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이 번진다.
가까이 내 생활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오는 걸 막지 못하고 있는 내가 한심스럽다.
나의 연인은 우진 씨인데 이상하리만큼 가까이 이 여자와 함께 한다.
어느새 같은 세계 안에 셋이 공존하고 있다.
그 안에서 두 명의 여자는 적대적이지 않은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