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집념 08화

마중

by 로지

우진 씨의 부재는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인정해 주고 대신 내가 나서서 그 여자 특유의 공격성을 받아들이고 있으니

우진 씨는 나의 우산을 쓰고 잠시 회피하며 멈출 수 있다.

두 여자 사이에 흐르는 기운을 살피며 본인의 태도를 분명하게 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려던

찰나 우진 씨는 긴 학회 일정을 선택했다.

나름의 안전한 도피처일 테다.

그런 우진 씨의 모습을 목도하자니 내 안의 울렁거림을 피할 수 없지만 도전 혹은 공격이라 칭할 수 있는

그 여자의 횡포를 기꺼이 끌어안은 내 탓이다.


우진 씨에 대한 원망은 평범하지 않은 성격을 가진 여자와 오랜 기간 동안 미래를 꿈꾸며 만나왔다는 것이다. 충동적이고 위험 섞인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동갑의 여자라니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건지

한참을 고민해 봐도 역시 정답은 없다.

어떤 방식으로 맞서봐도 예상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거다.


돌발적인 연락이 또 오리라는 짐작을 열어두고 오전부터 바쁜 회사 업무 일정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더 산만하다. 아직까진 사생활이 일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고 싶지만 주변의 동료들과 후임들은 달라진

내 분위기를 살핀 지 여러 날 되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직장인들에 대한 험담을 쉽게 했던 나는 그들을 십분 이해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동안 일을 꽤나 잘해 내는 내가 아니라 일신의 큰 뒤척임 없는 날들을 보냈던 거다.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생기는 오류쯤은 있지 않나.

그것이 치명적인지,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가 튕기는 정도인지 각각 다르겠지만 아주 오랜만에 생긴 연애 감정에 매료되어 있을 때 들이닥친 사건이라 휘둘리는 거라고 스스로를 안정시키는 법도 배워간다.

유의미한 배움인지 아닌지는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현실에 순응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하고 싶어서 그 여자를 피하지 않는다.

하지만 점점 나도 모르는 새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관계의 회의감속에서 냉소적으로 변해감을 인지하고 있다.


난 연애를 했을 뿐이다.

아주 평범한 연애를.

하지만 누군가에게도 같은 혹은 아주 흡사한 경우가 있지 않을까?


우진 씨는 사람 좋기로 정평이 난 외과의사다.

직업의 특성 때문에 의료인들의 좋은 성격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천재적인 두뇌와 타고난 감각으로 환자의 위험한 병변을 잡아내고 치료하는 걸

훌륭한 의사라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들은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직면한 환자를 안전하게 구해내느냐가

관건이므로.


그리고 최선의 방법으로 환자의 회복력에 힘쓴다.

응급상황에 빠른 대처를 위해서 우진 씨는 당직 날 음주를 피하고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친 뒤

다음 학회 일정에 필요한 공부를 하곤 했다.


차분한 성품덕에 의료인으로서의 직업적 소양이 돋보이는 사람이다.

동료들과 선배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편이다.

작은 소모임부터 주요한 모임의 임원 역할도 하고 힘든 일들을 꽤나 멋지게 즐기면서 해 내는 모습이

안정적인 사람이다. 필요한 자들에게 극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본인의 직업에 만족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이 빛나기에 밝은 인상을 가진 우진 씨는 내게도 똑같이 인정받고 싶어 했다.


어린아이처럼 오늘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이끈 스토리를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는 걸 좋아한다.

마치 어린 시절 상을 받고 부모님께 받는 칭찬을 나에게도 기대하며 잔뜩 상기된 눈빛으로

장난을 치는 애교도 넘치는 남자다.

어쩌면 한지은 씨의 마음을 너무나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오랜 기간 막역한 사이였던 연인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다니

받아들일 수 없을 거다.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잘 못하는 체질이지만 우진 씨를 분석해 보면 그 여자의 허망한 마음

한 구석쯤 알아주는 건 쉬운 일이다.


그들과 아무 상관없는 제삼자의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우진 씨에게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과 그 여자에게 생기는 연민의 감정까지 아무렇지 않을뿐더러 깊은 공감 또한 해 줄 수 있다.

그렇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복잡한 심경을 펼쳐보며 공감이 가능해질 때

우진 씨의 귀국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뾰족해진 감정을 다듬고 다툼으로 번질 대화를 피하고 싶어서 가능한 문자와 메일을 이용했다.

그 여자가 나타난 후 우진 씨가 내게 가장 답답해하는 부분이다.

외골수에 고집이 가득 찬 연인이 되어버렸지만 나름대로 그를 지키는 방법이다.

우진 씨 못지않게 나 또한 내 안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기에.


일주일의 학회 일정을 소화하고 입국장으로 나오는 우진 씨의 얼굴은 나를 보고 환해진다.

서로 힘겨운 감정의 소모를 겪고 나니 오랜만에 만나는 애틋함이 복잡스러운 감정들을 던져버렸다.


여느 사이좋은 연인들을 방불케 하는 재회의 포옹을 나눈 뒤 서로 밀착해서 나란히 걸었다.

공항이라는 설레는 공간에서 어느 말도 꺼내지 않고 손을 맞잡은 채 주차장으로 향했다.


안도감이 드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닐 거다.

그도 나와 같은 감정이 분명하다.

다른 생각 따위는 잊고 회포를 풀려 단골 이자카야를 찾았다.


"미리 예약을 하려는데 애를 먹었어. 여길 꼭 오고 싶은데 그새 인기가 많아졌나 봐."

그는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한다.


우진 씨는 어디든 인상이 남는 장소라면 나를 꼭 데리고 간다.

우리만의 요새처럼 자주 찾았던 그곳은 입이 짧은 우리의 기호를 알아주듯 작은 접시 위에 고급스러운 안주류와 프라이빗한 룸으로 구성된 동네의 작은 술집이다.

처음 사랑에 빠진 걸 알았을 때부터 우린 이곳을 자주 찾았다.

관계 환기를 위해서 우진 씨는 많은 장소 중 추억 쌓기 기여도가 가장 높은 이곳에 오려고 노력을 한 모양이다. 나도 이곳이라면 우진 씨와 날을 세우지 않고 대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장소가 주는 힘 혹은 추억이 주는 선물일 거다.

젊은 주인은 우리에게 불필요한 말을 걸지 않고 서비스 안주를 챙겨줄 만큼 호감을 표 했다.


사실 각자 꺼내놓고 싶은 이야기가 넘치지만 약속이나 한 듯이 입가에 미소만을 머금은 채 지금에 집중했다.

마주 앉아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서러움을 담아 전할뿐이다.

여러 날의 긴장감을 내려놓아서 그 무게만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것 역시 내려놓았다.

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꺼내어지는 게 싫었다.


전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천천히 마셨고 오늘만큼은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차분함과 따뜻함.

웃는 시간이 전부인 기묘함이 있다.

세상이 잠시 멈추는 것만 같은 기묘함이다.


일주일.

그의 길고도 짧은 출장 시간이 우리를 다시 메어놓을 수 있다니.

운명을 거스르고 싶지 않다. 우진 씨는 나와 깊은 인연이고 기꺼이 함께 난항을 헤쳐나갈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역사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테니까.

해결해야 하는 매듭을 풀어 나가는 일은 고난이 아닐 수 있다.

숙고하는 성질을 가진 내가 만들어낸 허상 일 수도.

제발 그러기를.

그래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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