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인 하나 없는 미국 코네티컷 주의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학교 생활을 했을 때, 한국인이 없어서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영어를 배우러 왔는데 한국어만 쓰다 보면 영어가 빨리 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쉬운 것은 아니었다. 간단한 안부 묻는 것 이외에 내가 쓸 수 있는 표현은 극히 한정되어 있어서 새로운 친구들과 사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 나는 조용히 앉아서 관찰만 했던 것 같다.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관찰력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내 언어 능력의 한계 때문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농담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친구들이 미안해서 남들이 웃을 때 한 박자 늦더라도 같이 웃으려 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아도 고개만 끄덕이길 반복했다. 그래서 친구들을 물론 선생님들도 내가 수업에 잘 따라오고 있다고 알고 계셨다.
그러나 내 첫 쿼터(quarter) 성적표는 달리 말해줬다. 내 생애 처음으로 ‘D’를 받은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양' 이면 낙제나 마찬가지의 성적이었다. 내가 ‘D’를 받은 수업은 ‘American Studies’라는 우수반 시간이었는데, 미국 역사(American History)와 문학(American Literature)을 2교시에 걸쳐 동시에 배웠다. 한 반에 선생님도 두 분이셨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만 들어도 되는 한국에서의 교육과 달리 책에 대한 토론 등 학생들의 활달한 참석을 요구하는 것도 내게는 생소했다. 아직 귀도 안 들려 지금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주제 파악도 한 참 걸리는 내가 내 의견을 언제 정해 번역해서 알릴 것인지 도통 몰랐다. 항상 말할 타이밍을 놓이기 일쑤였다. 무한도전 초반에 개그맨 정형돈 님이 개그콘서트와는 전혀 다른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호흡 맞추기 너무 힘들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환경이 바뀌니, 내가 예상했던 수업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에 적응해야 했다. 봐야 되는 눈치도 바뀐 것이다. 이 수업을 적극 권장하신 분은 나의 호스트 맘이셨다. 매년 교환 학생을 들이시며 미국 문화 알리는 것에 앞장서시던 우리 호스트 맘은 이 수업에 대해 잘 알고 계셨고, 내가 수업 시간표를 짤 때부터 꼭 들어보라 권하셨다.
하지만 내 영어 실력으로는 수업에 따라가기 역부족이었다. 오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국사 책 보다 4배는 돼 보이는 두꺼운 교과서를 들고 다니기도 무거웠다. 미국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내게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전쟁터에서 일어난 디테일 하나하나가 기록에 남아 배운다는 것도 신기했다. 내가 그 책 한 장의 꼬부랑글씨를 해석하려 전날밤 새벽 2시까지 사전과 씨름하고 겨우 4시간 자고 다시 6시에 일어나 스쿨버스를 타야 했던 것을 다른 친구들은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고전 영어(Old English)로 적은 클래식 미국 소설책을 매주 읽어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표준말이 아닌 비공식적 방언, 슬랭(slang) 등 생소한 표기법 때문에 애를 먹었다. 수업 중 토론 시간에도, 겨우 들리는 건 고작 서너 개의 단어, 그리고 이를 실로 바느질하듯 연결해 보려 안간힘을 썼다. 들리는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거기서 나온 내 생각이 한국어로 만들어지면 그것을 머릿속에서 다시 영어로 번역하고, 말하기 전 그게 문법에 맞는지 따지다가 그 사이 대화 주제가 금세 바뀌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다. 내가 D를 받은 이유도 따로 받은 종이 없이 수업 시간에 말로 알린 숙제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충격의 성적표가 나오고 난 뒤, 그 두 분의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러내어 보자고 하셨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선생님께서 “다른 수업을 들어보는 게 어떨까?” 하시는 것이 속상했다. 솔직히 그 말씀을 듣고 맨 처음 생각했던 건, ‘그럼 내 인생이 얼마나 편해질까’ 하는 것이었다. 꼭두새벽까지 숙제하고 오늘 진도 나갈 것을 미리 학습해야 겨우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던 터라, 이제 그렇게 안 해도 되는 것이 끌리긴 했다.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건 바로, ‘지금 이걸 직면하지 않고 포기하면 다음에 다시 도전하는 데는 더 힘들겠지.’ 내가 현재 더 두려웠던 건 내가 이번 실패로 끝나면 다음에는 재도전 자체가 더 두려울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결국, “그냥 계속해볼게요.” 대답했다.
매일 <워드 스마트(Word SMART)>라는 단어장을 공부하면서 늦게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호스트 맘이 무슨 죄길래 내 숙제를 도와주시다 함께 고초를 겪으셨다. 그러다 우리 둘 다 거실에서 불 켜놓고 잠들었다 새벽에 깬 적이 종종 있었다. 그때 공부했던 단어 중에 ‘불순물에 섞이다’ 또는 ‘타락하다’는 뜻의 ‘adulterate’을 공부하면서 “Adults are ADULTerated!”이라고 말하면서 외웠는데 마미가 그걸 보고 어처구니없어 픽 웃으셨던 밤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렇게 공부했더니 어느 순간 대화 속에서 내 귀에 들어오는 단어 수가 점차 늘어났고, 수업 시간 토론에도 참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artificial’을 문장에 넣어 말하는 것을 보고,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Wow. Artificial, that’s a big word,” 놀랍다는 눈치였다. “Your English has gotten so much better!” 그 친구의 칭찬에 우쭐하여 내가 발전하긴 했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그 수업에서 마지막 과제로 한 사람당 1교시 동안 선생님처럼 수업을 이끌어야 했다. 내가 원하는 주제로 교육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학생들 앞에서 가르치는 경험의 첫 발이었다. 마미가 도와준 덕분에 잘 끝낼 수 있었고 결국 ‘A’로 마쳤다. 마미가 다른 학부모, 선생님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 선생님이 나에 대해서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내가 처음에 정말 많이 힘들어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노력이 더 가상하게 여겼을지 모른다. 나도 내가 자랑스러웠다. 내가 노력한 만큼 성과가 달라진 것이 공부에서 확인할 수 있어 더 학업 성취에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내가 미국에서 점차 적응하면서 다가오는 기회가 많아졌다. 나는 두려움도 비교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 두려워했던 것은 지금 실패하는 것보다 나중에 다시 도전할 염두도 나지 않아 평생 발전하지 못할 것 같은 것이었다. 그때 내가 의도적으로 내린 결정이 앞으로의 미국 삶에서 두고두고 돌아보며 마음을 단단히 하게 될 경험이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설렘’과 화학적으로 그다지 다르지 않은 신경물질을 보낸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기 전 “저 여기에 와서 지금 무척이나 신나요!” 한 마디 하는 것이 발표할 때 두려움을 떨쳐내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누구나 ‘들뜬’ 흥분 상태를 무섭게 여기지 않고 신나게 여긴다면 그 효과를 볼 수 있다. 내가 같은 것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뇌가 어떻게 경험하고 기억하는 지도 달라진다. 시간이 만능치료약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이 과거의 기억을 곧이곧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기억을 더 흐릿하게 하고, 평범한 기억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관점이다. 여행 도중 비가 오는데 ‘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로망이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세상의 데이터를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같은 경험을 전혀 달리 느껴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랫동안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내 차를 갖게 되었을 때, 하늘을 날 것 같았다. 한국과 같이 편리한 대중교통이 아닌 미국에서 내가 제삼자의 시간표에 내 삶을 설계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아무리 교통 체증이 심해도 ‘그래도 버스 탈 때보단 낫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불편한 통근 경험 ‘덕분에’ 달라진 비교 대상이다.
그래서 요즘 Z세대의 '뻔뻔함'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입사 계약서에 적혀있지 않은 과제는 내 알 바 아니며, 너(회사)의 돈과 내 시간을 바꿔치기하는데 내가 할 일은 딱 여기 까지라는 선을 긋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일과 커리어에 대한 장밋빛 시각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 사실 밀레니어 세대에서도 평생직장이라는 표현이 없어졌다. 한 회사와 5년, 10년, 20년을 함께해도 해고 이메일 한 통만으로 끊어질 수 있는 것이 회사 인연이다. 절대 "우리는 가족이다"라는 감언이설로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 세대이다. 오히려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3년마다 이직하는 것과 비교해서,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2차 세계대전 후 태어난 부머 세대의 은퇴가 늦춰졌고, 은퇴하고 받을 수 있는 연금(pension) 제도도 공무원이나 특수 직업이 아닌 이상 거의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매년 승진 사다리를 타더라도, 돈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인지하면서 실상 얻은 것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과거의 삶이 비교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코로나 전에 매년 회사가 열어주던 retreat으로 해외여행을 하던 베네핏도 찾기 힘든 시대다. 과거보다 나아진 게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에게, 일과 커리어에 대한 환상이 깨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그래도 한 번씩 오는 당근에 굽신거리는 것보다 "당연한 거 아니야? 원래 이래야 하지 않아?" 하는 Z세대의 당당함 또는 뻔뻔함을 부러움과 질투, 응원이 섞인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코로나가 우리 삶에 준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재택근무의 실용성과 가능성을 널리 퍼뜨렸고,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지 현실 감각을 챙겨준 건 사실이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커리어는 뭐고 자기 계발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 그냥 일은 단순히 '일'일 뿐이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수단(means to an end). 그냥 그때뿐인 연료라는 생각. AI로 '쉽고 빠르게' 부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하는 현실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가치(value)'란 무엇이고, '가치는 누가 만들어내는가'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더불어 이런 사회를 미래로 이끌어가는 차세대 리더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가 남이 보는 가치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볼 때마다 소통하는 인간관계는 AI도 바꿀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