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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대 이력서#02]나는 자퇴생, 지방대 재학생

저의 게으름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by 다소

그리하여 저는 한순간에 자퇴생, 아니 '재수생'이 되었습니다.


저의 호기로운 자퇴 계획을 친구들에게 처음 밝혔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참 다양했습니다.

부정, 긍정, 응원, 걱정

당시에는 제가 엄청난 인생의 결정을 내린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습니다.

계획이요? 당연히 없었죠. 그냥 무조건 지금보다는 좋은 대학에 갈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만 있었습니다.


"공부는 진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해야겠다."


참 염치도 없던 저는 동네에서 가장 비싼 독서실의 VIP 독방 이용권을 바로 결제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호기로운 패기는 독방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곳은 저의 꿈을 이루는 공간이 아니라, 완벽하게 아늑한 휴식공간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독방에서 저는 공부 대신 연금술사가 나오는 만화에 푹 빠졌죠. 심지어 다섯 번 넘게 정독하며 대사를 줄줄 외우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왜 자퇴했더라?"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혼자서는 절대로 공부할 수 없는 인간이었죠.

결국, 부랴부랴 남부터미널역 근처 재수학원으로 도망쳤고, 저는 재수학원 첫날부터 완전히 다른 세계로 떨어졌습니다.


한쪽에서는 해병대에서 갓 전역한 돌격머리 형이 무서운 기세로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문제를 풀었고, 다른 쪽에서는 이미 명문대생이면서 서울대를 목표로 삼수째 도전 중인 형이 있었습니다.

또, 부상으로 축구를 접고 뒤늦게 입시전쟁에 뛰어든 동갑내기 친구는 전투적으로 책과 싸우고 있었죠.

그리고 그 사이에 저는…?


여전히 목표도 열정도 없이 "남들이 하니까 나도 왔어요" 수준의 여전한 어중이떠중이였습니다.


하지만 옆자리의 열정 넘치는 사람들과 하루 종일 함께하며 처음으로 저의 나태함에 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열심히 따라 해 봤지만, 꾸준하게 성실히 달려온 사람들의 습관을 고작 몇 달의 노력으로 따라잡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결과는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났죠.


제 인생 두 번째 수능 성적표는 당연히 작년과 똑같았습니다.

누군가는 캠퍼스에서 눈부신 스무 살을 보내는 동안, 저는 독서실 독방에서 만화만 보며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한 셈이었죠.

최선을 다했냐는 부모님의 질문 앞에 한 번도 당당하게 "네!"라고 말하지 못한 저는,


그렇게 스물한 살의 봄, 지방의 어느 대학 신입생으로 다시 출발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3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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