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잖아. My Way..
남편은 80번째 생일에 윌셔 컨트리클럽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My Way)’를 불렀다. 이 노래는 그의 18번이다.
그의 인생은 늘 ‘홀로서기’였다. 낯선 미국 땅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겪어야 했고, 어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그는 이 노래를 흥얼대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마이 웨이처럼 이국의 땅에서 은행가로서 성공했다. 그만의 철학으로, 인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냈다고 나는 믿는다.
미주 한인 언론에서 남편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혁신’, 그리고 ‘최초’라는 말이다.
미국의 주류 은행과 기업에서 20년, 그리고 한인 교포 사회에서 다시 20년. 그는 언제나 이해타산보다 고객을 먼저 생각하는 은행가였다.
그 결과, 한인 은행 최초로 미국에 진출했던 한국외환은행, 한국기업은행, 한국제일은행의 인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나스닥 상장, 여성 지점장 배출 등 그 시절로서는 파격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모든 것은 그의 결단과 철학에서 비롯된 선택이자 결과였다.
1988년 H은행장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우리가 기억하는 엘에이 4·29 폭동이 일어났다.
당시 한인 타운은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약탈과 방화로 폐허가 되었다.
남편은 피해를 입은 80여 개의 업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는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역사』를 다시 읽으며, 창업자 ‘아마데오 지아니니’가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 마차에 1만 달러의 현금을 싣고 거리에서 소액 대출을 했던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그는 결단했다.
피해를 입은 한인 소상공인을 위해 피해 성금을 전달하고, 최대 10만 달러까지 무담보 대출을 실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사회에서는 부실 위험과 회수 가능성을 이유로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말했다.
“남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돕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정당한 사업입니다.” — 아마데오 지아니니
남편은 커뮤니티 은행의 역할, 그리고 한인이 세운 은행의 존재 이유를 설득했고, 결국 반대하던 이사진의 마음도 움직였다.
그 결과, 무담보 대출을 받은 30여 명 중 단 한 명도 변제를 하지 못한 이가 없었다.
1994년, 파산 직전의 N은행 행장으로 취임한 그는, 4년 만인 1998년 1월 29일, 나스닥 상장이라는 놀라운 쾌거를 이뤄냈다.
이사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장 은행으로서의 잠재력”을 끝까지 설득했고, 결국 [N]이라는 티커로 거래가 시작되며 은행 자산은 수십 배로 불어났다.
남편은 행장으로서 발생하는 이익 배당금을 직원들과 나누었다. 단, 세금은 반드시 스스로 내도록 했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존중, 남녀평등의 가치, 그리고 구조적 장벽을 넘는 가능성에 대해 누구보다 열려 있었다.
그러나 처음 마주한 한인 은행은 매우 위계적이고 경직된, 한국식 조직 문화를 고스란히 따르고 있었다.
남자 직원들은 더 많은 수익을 찾아 은행을 떠나기 일쑤였고, 오히려 여성 직원들 중에 성실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많다고 판단했다.
그때부터 그는 여성 인재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키우기 시작했다.
1990년대의 한인 사회에서는 드물었던, ‘뉴 패러다임’의 출발이었다.
그는 능력 있는 여성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역량을 키워줬고, 그 결과 한인 은행 최초의 여성 지점장, 그리고 여성 행장이 탄생했다.
물론 그 과정에는 관행과 학벌 중심의 선발 문화, 여성을 향한 사회적 편견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철학대로 사람을 봤고, 그 결과 그와 함께했던 여성 후배 중 네 명이 각각 은행장이 되었다.
1998년, 그는 한국 외환은행의 뉴욕 플러싱 지점을 인수했고, 2000년에는 한국 제일은행의 뉴욕 지점도 인수하였다.
이사진과 한국 측 모두 부정적이었지만, 그는 두 방향에서 설득했다.
한인 커뮤니티 은행이 한국은행을 인수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미국 내 한인 경제권의 독립성과 자립을 보여줄 수 있다.
그 결과 인수합병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N은행은 H은행으로 성장하며 미주 최대 한인 은행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반대와 비판 속에서도, 자기만의 길(My Way)을 걸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이어도,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리고 지금, 인생의 마지막 장을 함께 쓰는 동반자로서 50살 나이 차이를 뛰어넘은 나와 함께한 지 벌써 14년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She is My Way.”
“아내와 함께라면, 그 어디라도 갈 수 있어.”
3년간의 연애 끝에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고, 신혼의 시작은 속초였다. 나의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있었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서의 시작을 원했다.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마친 뒤, 속초에 있는 골프장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를 계약했다.
SNUH에서 퍼스널 병원 코디네이터로, 특히 VIP 환자를 전담하며 바쁘게 살던 나는, 속초라는 낯선 도시와 조금의 쉼을 품은 삶에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아파트 인테리어가 진행되는 3개월 동안 매주 새벽, 남편과 교대로 운전하며 속초로 향했다. 사람 좋은 속초 사람들과 질 좋은 해산물, 그리고 새로 시작되는 우리의 공간. 모든 것이 설레고 벅찼다. 하지만 그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신혼 초, 미국 생활에 익숙한 남편은 어느 날부터 한국식 돌솥밥과 냄비밥을 원했고, 식당 주방에까지 들어가 나를 ‘견학’시키기도 했다. 평생 의료 현장에서 전문성을 기반으로 일해온 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가정주부의 역할 속에서 점차 지쳐갔다. 예쁘게 다듬던 손톱은 사라지고, 손마디는 굵어졌으며, 손에는 화상 자국이 남았다. 나는 낯선 나를 마주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유일하게 친분을 쌓아가던 커피숍 주인 부부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남편의 ‘비서’로 오해하기 시작했다. 나의 존재를 배제한 채, 남편에게 다른 여성을 소개해주겠다는 대화까지 내가 있는 자리에서 공공연히 오갔다.
“당신은 대학도 안 나왔겠지? 그럼 여기서 영어로 이야기해 봐요.”
“우리 고추는 먹긴 해요? 다 버리죠?”
“언제 결혼했어요? 처음 봤을 땐 비서 같았는데?”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는 이들의 편견과 조롱은, 마치 바늘처럼 내 마음을 찔러댔다.
그 시절 나는 매일 저녁 아파트 뒤편 그네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우울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감정을 청소로 이겨내기 시작했다. 55평 아파트를 아침저녁으로 쓸고 닦고, 먼지 한 톨 없이 반짝이는 집 안은 나의 의지이자 방어막이었다.
다행히도, 뜻밖의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척산온천에서 만난 목욕 친구들. 응급환자를 돕다 알게 된, 인생 선배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들의 남편 역시 내 남편과 같은 온천에서 목욕을 즐기던 친구들이었다. 그 우연의 인연들이 나를 버티게 해 줬다.
엄마의 병환이 호전된 후에야 우리는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친정가족들이 번갈아가며 속초의 집을 별장처럼 관리해 주었지만, 어느 날 큰 화재가 발생했고 나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때 마음을 굳혔다. ‘이제는 이 도시를 떠나야겠다.’
속초는 우리의 첫 보금자리였고, 많은 애정과 추억이 깃든 집이었지만, 그곳은 이제 지우고 싶은 기억이 되어버렸다.
2016년 5월, 미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우리는 집을 내놓았고, 1주일 만에 팔렸다. 집을 정리하러 속초에 남은 남편과 달리,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홀로 서울로 향했다.
그때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러나 미국에서도 편견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따라왔다.
어바인에서 옆집에 살던 한국인 가족. 어느 날 그 집에 방문한 친정어머니가 내게 “밤일하느라 피곤했겠다”는 말을 건넸다. 어안이 벙벙했다. SNUH에서 환자를 돌보던 나에게, 그들이 씌운 오해의 프레임은 ‘화류계 여성’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 대신 나를 지키겠다. 그렇게 우리는 더 여유로운 동네로 이사를 갔다.
이사 후에 만난 다민족 이웃들은 오히려 더 따뜻했고, 열린 시각을 가졌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 속에서의 봉사활동은 나를 위로하고,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했다.
“You are such a lovely person, and Ben is so fortunate in having you in his life.”
하와이로 이주한 후, 더 많은 배려와 미소, 무심한 듯 따뜻한 하와이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나는 다시 나를 찾았다.
이민 후, 나는 내가 공부했던 전공 외에도 사회 현상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을 갖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나 자신을 사회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는 알게 되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 이후, 사람들은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나의 자신감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말한다.
“나는, 그의 아내”라는 말보다 “그는, 나의 남편”이다.
My Way. So What? So Be It.
편견은, 나를 시험하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
결국, 승리자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