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아스클레피오스가 왕에게

제16장. 아스클레피오스가 왕에게

by 이호창

제16장. 아스클레피오스가 왕에게


아스클레피오스: 오, 왕이시여, 만일 당신께서 그것을 생각하신다면, 육체들 가운데에도 비물질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왕: 그것들이 무엇인가? (왕이 물었다.)

아스클레피오스: 거울에 나타나는 육체들, 그것들은 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왕: 그러하도다, 오, 아스클레피오스여. 그대는 신처럼 생각하는구나! (왕이 답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 이것들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것들이 더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형상들(forms) 말입니다. 그것들은 당신에게 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혼이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영혼이 없는 것들의 육체 안에서도 나타나지 않습니까?

왕: 그대가 옳게 말하는구나, 아스클레피오스여.

아스클레피오스: 그러므로, 비물질적인 것들의 육체 위로의 반영이 있고, 또한 육체들의 비물질적인 것 위로의 반영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감성계(Sensible World)의 지성계(Intelligible World) 위로의 반영과, 지성계의 감성계 위로의 반영입니다. 그러므로, 오, 왕이시여, 형상들(images)을 숭배하십시오. 그것들 또한 지성계로부터 온 그들의 형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폐하께서 일어서서 말씀하셨다.)

왕: 예언자여, 손님들의 안위를 돌볼 시간이오. 내일, 우리의 거룩한 대화를 다시 이어가도록 합시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왕에게」 주해


상징의 심연, 거울의 비의


열여섯 번째 논고는 갑작스럽게 시작하여 더 갑작스럽게 끝나는, 하나의 미완성된 대화의 파편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 짧은 토론 속에 담긴 내용은, 보이는 것(현상)과 보이지 않는 것(본질)의 관계라는 형이상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에 대한 헤르메스주의적 답변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암몬 왕을 이끌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거울’이라는 사물을 통해, 물질세계와 정신세계가 어떻게 서로를 반영하고 교감하는지에 대한 심오한 비밀의 문을 엽니다. 이 논고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물질적 형상(image)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의 그림자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 숭배받을 가치가 있는 신성한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헤르메스주의의 세계-긍정적이고 상징주의적인 태도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거울에 비친 육체: 물질 속의 비물질


대화는 아스클레피오스의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오, 왕이시여, 만일 당신께서 그것을 생각하신다면, 육체들 가운데에도 비물질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상식적인 이원론, 즉 육체는 물질적이고 정신은 비물질적이라는 단순한 구분에 도전하는 역설적인 명제입니다. 왕이 그 예시를 묻자, 아스클레피오스는 “거울에 나타나는 육체들”을 제시합니다.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분명 우리의 육체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만져지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명백히 ‘비물질적인’ 육체입니다. 왕은 이 통찰에 감탄하며 “그대는 신처럼 생각하는구나!”라고 외칩니다.


이 간단한 문답은 우리를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의 중심으로 곧바로 데려갑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이 감각 세계 전체가, 사실은 거울에 비친 상(像)이나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처럼, 더 높은 차원의 진정한 실재(이데아의 세계)를 불완전하게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울 속의 이미지가 실제 육체에 의존하여 존재하듯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적 존재들은 그들의 보이지 않는 원형, 즉 ‘형상(forms)’에 의존하여 존재합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형상들이 “영혼이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영혼이 없는 것들의 육체 안에서도 나타난다”고 말하며, 모든 물질적 존재가 그 이면에 비물질적인 원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중의 반영: 하늘과 땅의 교감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아스클레피오스는 마침내 이 논고의 핵심적인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므로, 비물질적인 것들의 육체 위로의 반영이 있고, 또한 육체들의 비물질적인 것 위로의 반영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감성계의 지성계 위로의 반영과, 지성계의 감성계 위로의 반영입니다.”


이것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As above, so below)’라는 헤르메스주의의 대원칙에 대한 가장 명료하고도 아름다운 설명입니다. 하늘(지성계)과 땅(감성계)은 서로 단절된 두 개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를 영원히 비추는 두 개의 거대한 거울과 같습니다. 이 땅의 모든 나무와 돌, 강과 산들은 하늘에 있는 그들의 영원한 원형을 반영하는 그림자입니다. 동시에, 하늘의 신성한 힘과 질서 또한 이 땅의 구체적인 사물들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작용할 수 있습니다. 즉, 신은 인간을 통해 자신을 알고, 인간은 신을 통해 자신을 압니다. 이처럼 우주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 반영과 교감의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형상의 숭배: 보이는 것 안에 깃든 신성


이러한 우주론적 통찰은 필연적으로 매우 급진적인 실천적, 종교적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오, 왕이시여, 형상들을 숭배하십시오. 그것들 또한 지성계로부터 온 그들의 형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유대-기독교적 전통에 대한 정면 도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르메스주의의 관점에서, 보이는 형상(image)을 숭배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만일 모든 가시적인 사물이 보이지 않는 신성한 원형의 반영이라면, 그 형상을 숭배하는 것은 곧 그 형상을 통해 그 배후에 있는 신성한 실재를 숭배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이암블리코스(Iamblichus)가 발전시킨 신성 마법(theurgy)의 철학적 토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신성 마법에서, 신상(神像)이나 상징물과 같은 물질적 대상에 행해지는 경건한 의식은, 그 물질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을 매개로 하여 그와 상응하는 우주적 힘, 즉 신성을 이 땅에 불러내리고 그와 교감하기 위한 신성한 기술입니다.


이처럼 이 짧은 단편은 헤르메스주의가 세계를 부정하는 급진적인 영지주의와 어떻게 다른 길을 가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물질세계는 더 이상 영혼의 감옥이나 저급한 환영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신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거룩한 현현의 장소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형상들은 신성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상징들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신성한 상형문자(hieroglyph)로 읽어낼 줄 아는 자, 그리고 그 보이는 형상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신성을 숭배할 줄 아는 자야말로, 진정한 헤르메스주의의 길을 걷는 자입니다.


대화가 “손님들의 안위를 돌볼 시간”이라는 왕의 현실적인 말로 갑자기 끝나는 것은, 이 모든 심오한 형이상학적 담론이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사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과 분리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지혜는 하늘을 관조하는 것과 땅의 의무를 다하는 것, 그 둘 사이의 균형 속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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