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왕들에 대한 찬가

제17장. 왕들에 대한 찬가

by 이호창

제17장. 왕들에 대한 찬가

(육체의 정념에 의해 방해받는 영혼에 관하여)


1. 이제, 뮤즈와 같은 멜로디의 조화로운 기술을 공언하는 이들의 경우, 작품이 연주될 때 악기들의 불협화음이 그들의 의도를 방해한다면, 그 연주는 우스꽝스러워진다. 그의 악기들이 요구되는 바를 감당하기에 너무 약할 때, 그 음악-예술가는 필히 청중에게 비웃음을 당해야 한다. 그는 온전한 선의로, 지치지 않고 그의 예술을 베푸나, 그들은 그 예술가의 약함을 탓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음악가-신이신 그는, 그의 천상의 노래들의 조화를 만드실 때뿐만 아니라, 그의 노래의 멜로디의 리듬을 개별 악기들에게까지 내려보내실 때에도, 신으로서 결코 지치지 않으신다. 신께는 지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만일 어떤 음악가가 그의 예술의 가장 높은 경연에 들어가기를 원할 때, 트럼펫 연주자들이 작곡가의 기교의 동일한 악구를 연주하고, 그 후에 플루트 연주자들이 그들의 악기로 멜로디의 감미로운 음들을 연주하며, 그들이 피리와 플렉트럼으로 작품의 음악을 완성할 때, 만일 어떤 것이 잘못된다면, 사람들은 그 음악-제작자의 영감을 탓하지 않는다.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그에게 마땅한 존경을 표하며, 사람들은 악기의 거짓됨을 탓하니, 그것이 가장 탁월한 자들에게 방해가 되어, 음악 제작자를 그의 멜로디 실행에 있어 난처하게 만들고, 듣는 이들로부터 노래의 감미로움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3.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에도, 우리 청중 중 누구도 육체에 내재한 약함 때문에 우리의 종족(Race)을 불경하게 탓하지 않게 하라. 아니, 그로 하여금 신은 지치지 않는 영(Unwearied Spirit)이심을 알게 하라. 영원히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과학, 즉 앎을 소유하시고, 그의 기쁨의 선물들을 끊임없이 베푸시며, 어디에나 같은 혜택을 내리시는 분이심을.


4. 그리고 만일 페이디아스(Pheidias), 즉 데미우르고스(Demiurge)께서 그의 숙련됨을 완성할 물질의 부족으로 인해 응답받지 못하신다 해도, 비록 예술가께서는 자신의 몫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셨을지라도, 우리는 그를 탓하지 말자. 오히려, 우리는 현의 약함을 탓하자. 그것이 너무 느슨하거나 너무 팽팽하기 때문에 조화의 리듬을 망치는 것이다.


5. 그러므로 불운이 악기로 인해 발생할 때, 아무도 예술가를 탓하지 않는다. 아니, 더욱이, 악기가 우연히 더 나쁠수록, 예술가는 그의 손이 올바른 음을 더 자주 짚어냄으로써 명성을 더 얻게 되며, 듣는 이들은 그를 조금도 탓할 생각 없이 그 음악-제작자에게 더 많은 사랑을 쏟는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가장 고귀하신 분들이여, 우리 자신의 수금을 다시 조율하리니, 안에서, 그 음악가와 함께!


6. 아니, 나는 예술가들 중 한 사람을 본 적이 있으니, 비록 그가 수금을 연주할 힘이 없었음에도, 일단 그가 올바르고 고귀한 주제를 위해 훈련받았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악기로서 자주 사용하고, 신비들을 통해 그의 현의 봉사를 조율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그가 어떻게 필연성을 장엄함으로 바꾸었는지에 놀라게 했다. 물론 그대는 음악-작업의 주재자이신 신의 총애를 얻은 하프 연주자의 이야기를 알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상을 놓고 연주하고 있을 때, 현 하나가 끊어져 경연에 방해가 되었을 때, 더 나은 분(the Better One)의 총애가 그에게 다른 현을 공급해 주었고, 그의 손에 명성의 은혜를 쥐여주었다. 한 마리 메뚜기가 더 나은 분의 예지를 통해 그의 수금에 내려앉도록 만들어져, 끊어진 현을 대신하여 멜로디를 채웠다. 그리하여 그의 현이 수선됨으로써 하프 연주자의 슬픔은 멈추었고, 승리의 명성이 획득되었다.


7.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저의 경우라고 느낍니다, 가장 고귀하신 분들이여!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제 힘의 부족을 고백하고 잠시 약한 척하는 듯 보였으나, 이제 저 우월하신 분(Superior One)의 힘에 의해, 마치 왕에 대한 저의 노래가 그분에 의해 완성된 것처럼, 저의 뮤즈를 깨우는 듯합니다. 아셔야 할 것은, 이 우리의 의무의 끝은 왕들의 영광스러운 명성이 될 것이며, 우리의 담론, 곧 로고스(logos)의 선한 의지는 그들이 획득하는 승리들에 관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두릅시다! 노래하는 자가 그것을 원하며, 이를 위해 그의 수금을 조율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욱이, 그는 그의 노래를 위한 주제가 더 위대할수록, 더 감미롭게 연주하고, 더 적절하게 노래할 것입니다.


8. 그러므로, 그가 그의 수금의 현을 특별히 왕들에게 맞추었고, 찬양의 노래들의 조(調)를 가졌으며, 그의 목표로서 왕의 찬미를 삼았으니, 그로 하여금 먼저 가장 높으신 왕, 즉 만물의 신께 자신을 들어 올리게 하라. 위에서부터 그의 노래를 시작하여, 그는 이처럼 둘째로, 그의 형상을 따라 왕권의 힘을 쥔 자들에게로 내려온다. 왕들 자신도 실로, 노래의 주제들이 위에서부터 단계적으로 내려오기를 선호하며, 그들의 승리의 선물들이 그들을 위해 주재되는 곳으로부터, 그들의 희망이 질서 있는 계승 속에서 인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9. 그러므로 노래하는 자는 신, 즉 만물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시작하게 하라. 그는 영원히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우시며, 영원하시고 영원의 모든 힘을 소유하셨으며, 영광스러운 승리자이시며, 가장 먼저이시니, 그로부터 모든 승리가 계승하여 승리하는 자들에게로 내려온다.


10. 그러므로 우리의 담론, 곧 로고스(logos)는 왕의 찬미와, 공동의 번영과 평화의 주재자들인 왕들에게로 서둘러 내려간다. 그들의 주권은 가장 고대에 지고하신 신에 의해 가장 높은 정점에 놓였으며, 그들을 위한 상은 전쟁에서의 그들의 용맹 이전에 이미 준비되었고, 그들의 전리품은 충돌의 충격 이전에 이미 세워졌다. 그들에게는 단지 왕이 될 뿐만 아니라 최고가 되는 것이 정해졌다. 그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외국의 땅이 전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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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분의 축복과 왕의 찬미에 관하여)


11. 그러나 이제 우리의 주제, 곧 로고스(logos)는 그 끝을 그 시작과 섞기 위해 서두르니, 더 나은 분의 축복과 함께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평화라는 위대한 상을 주시는 저 가장 신적인 왕들에 대한 담론(logos)의 최종적인 끝을 맺는다. 우리가 더 나은 분과 위의 권능에 대해 다루며 시작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끝이 다시 같은 것, 즉 더 나은 분에게로 향하게 하자. 자라나는 모든 것들의 유모인 태양이, 처음 솟아오를 때, 그의 가장 강력한 손으로 그 산출물의 첫 열매들을 자신에게로 모으고, 그의 광선을 마치 그 열매들을 따기 위한 것처럼 사용하는 것과 같이(정녕, 그의 광선은 가장 향기로운 식물의 정수를 먼저 따는 그에게는 참으로 손이다), 우리 또한 더 나은 분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지혜의 흐름을 받아, 그것을 하늘들 위의 우리 영혼들의 정원으로 돌려, 이 축복의 흐름들을 다시 그들의 근원으로 향하도록 인도하고 훈련해야 한다. 그 발아의 온전한 힘을 우리 안에 부어주신 분은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12. 우리의 영혼들의 아버지이신 지극히 순수하신 신께 그의 축복을 다시 보내기 위해 일만 개의 혀와 목소리가 사용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합당한 것을 말할 수 없을지라도(우리는 그 과업에 훨씬 미치지 못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말할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마땅히 불러야 할 대로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힘에 따라 그들에 대한 합당한 감사를 드리며, 그들의 연약함에 대해 용서를 받는다. 아니, 오히려 신의 영광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에 있으니, 곧 그가 그의 자녀들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축복의 서곡이자 근원이며, 중간이자 끝은, 아버지가 무한히 강력하시고 결코 한계를 모르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13. 왕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우리 인간들은, 마치 왕의 자녀들인 것처럼, 그에게 찬미를 드리는 것을 우리의 자연스러운 의무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불충분함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하니, 비록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아버지에 의해 그것이 허락될지라도 그러하다. 그리고 아버지가 갓 태어난 아기들이 너무 약하다고 해서 그들을 외면하실 수 없는 것과 같이, 오히려 그들이 그의 사랑을 인지하기 시작할 때 기뻐하실 것과 같이, 만물의 그노시스(Gnosis of the all) 또한 기뻐할 것이니, 그것은 만물에 생명을 분배하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신께 축복을 되돌려 드릴 힘을 분배한다.


14. 신은 선하시고, 영원히 자신 안에 자신의 영원한 적합성의 한계를 가지시고, 불멸하시며, 끝에 이를 수 없는 그 상속의 운명을 자신 안에 포함하시고, 그리하여 영원히 그의 에너지로부터 흘러나오시며, 우리를 다시 집으로 데려오는 찬미를 드리도록 촉구하기 위해 이 아래 세상에 소식을 보내신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는 서로 간에 차이가 없으며, 그에게는 편애가 없다. 그들은 사유 안에서 하나이다. 하나는 만물의 예지이다. 그들은 하나의 마음, 즉 그들의 아버지를 가졌다. 그들을 통해 활동하는 감각은 하나이니, 곧 서로에 대한 그들의 정념이다. 만물의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사랑 그 자신이다.


15. 그러므로, 이처럼, 우리는 신의 찬미를 노래하자. 아니, 오히려, 우리는 먼저 그에게서 왕권을 받은 자들에게로 내려가자. 우리는 우리의 왕들로 시작하여, 그들을 대상으로 스스로를 연습함으로써, 찬미의 노래에 익숙해지고, 더 나은 분에 대한 경건한 봉사 속에서 스스로를 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미의 실천의 가장 첫 시작을 그로부터 시작하고, 그를 통해 우리의 찬미의 실천을 연습하여, 우리 안에 신에 대한 경건함의 실천과 왕들에 대한 찬미가 모두 있도록 해야 한다.


16. 우리에게 이토록 위대한 평화의 번영을 넓혀주신 그들에게 우리는 보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화를 확립하는 것은 왕의 덕이며, 아니, 그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러하다. 그는 왕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니, 그가 그의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불화의 정상들을 평평하게 하고, 평화를 위한 이성, 곧 로고스(logos)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로, 그가 자신을 그의 고국이 아닌 왕국의 자연스러운 보호자로 만들었기에, 그의 바로 그 이름이 평화의 징표가 된다. 참으로, 그대가 알다시피, 왕이라는 칭호는 빈번히 즉시 적을 제지했다. 아니, 더욱이, 왕의 바로 그 조각상들은 가장 폭풍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평화로운 항구이다. 왕의 모습 하나만 나타나도 승리를 얻고, 모든 시민에게 해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한다.



「왕들에 대한 찬가」 주해


1. 육체의 정념에 의해 방해받는 영혼에 관하여 (카논 1-10)


불완전한 세계 속의 완전한 예술가


열일곱 번째 논고는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 즉 완전하고 선하신 신께서 창조한 이 세계에 왜 고통과 불완전함, 그리고 악처럼 보이는 것들이 존재하는가라는 오래된 신학적 난제에 대한 헤르메스주의적 답변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사상 체계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를 창조한 신(데미우르고스)을 불완전하거나 사악한 존재로 설정하는 급진적인 이원론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 논고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저자는 신성한 예술가와 그가 사용하는 불완전한 악기라는 강력하고도 정교한 비유를 통해, 창조주(신)의 완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피조세계(인간과 자연)의 불완전함을 설명하는, 매우 미묘하고도 세계-긍정적인 철학을 펼쳐 보입니다. 이 서곡은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한계가 신의 실패나 악의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신성한 예술가의 위대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불완전한 악기의 소음임을 깨닫게 합니다.


신성한 음악가와 결함 있는 악기


논고는 “조화로운 예술을 공언하는” 음악가의 비유로 시작합니다. 만일 연주회에서 연주자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가 사용하는 악기 자체에 결함이 있어 “불협화음”이 발생한다면, 그 연주는 우스꽝스러워지고 청중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입니다. 이때, 지혜로운 청중은 연주자의 실력이 아니라 “악기의 거짓됨”을 탓할 것입니다.

헤르메스는 이 비유를 곧바로 신과 인간의 관계에 적용합니다. “자연의 음악가-신”이신 그는, “결코 지치지 않으시며” 영원히 완벽한 조화의 멜로디를 연주하십니다. 그러나 그 신성한 멜로디가 우리 영혼이라는 개별 악기를 통해 연주될 때, 종종 불협화음, 즉 고통과 악이 발생합니다. 헤르메스는 우리에게, 이 불협화음의 책임을 신에게 돌리는 “불경한” 행위를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신성한 음악가가 아니라, “육체에 내재한 약함”, 즉 우리라는 악기 자체의 결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정론적 해결책입니다. 악과 고통은 신에 의해 적극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정신이 불완전한 물질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는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제시한 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완벽한 제작자인 데미우르고스는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하여 최선의 코스모스를 만들려 하지만, 그가 작업해야 하는 원초적 질료(chora)는 그 자체의 비이성적이고 혼돈스러운 성질을 가지고 있어, 완벽한 모방을 방해합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이 겪는 고통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영혼이 담긴 육체라는 물질적 조건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예술가와 재료: 플라톤적 신정론


저자는 이 논증을 그리스의 위대한 조각가 ‘페이디아스(Pheidias)’의 비유를 통해 더욱 심화시킵니다. 페이디아스가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할지라도, 만일 그의 기술을 구현할 재료(대리석 등)가 부족하거나 결함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예술성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예술가가 아니라 재료의 한계를 탓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이라는 위대한 예술가가 우리를 빚을 때, 그가 사용하는 재료인 물질의 한계 때문에 불완전함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논의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역설적이게도, “악기가 우연히 더 나쁠수록, 예술가는… 명성을 더 얻게 되며, 듣는 이들은… 그 음악-제작자에게 더 많은 사랑을 쏟습니다.” 이는 고통과 한계라는 조건이, 오히려 신성한 기술과 은총의 위대함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는 무대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완벽한 악기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소리보다, 망가진 악기에서 기적적으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불완전함은 신의 실패가 아니라,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어내려는 신의 끊임없는 사랑과 창조적 노력을 목격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신성한 은총: 메뚜기의 노래


인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수금을 다시 조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육체와 정념이라는 악기를 최선을 다해 닦고 조율하여, 신성한 멜로디가 가능한 한 왜곡 없이 연주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완벽한 조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때, ‘신성한 은총’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개입합니다.


저자는 이를 “메뚜기의 노래”라는 아름다운 일화를 통해 설명합니다. 고대의 한 하프 연주자가 경연 중에 그만 현 하나가 끊어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음악의 신(아폴론)의 총애를 받은 한 마리 메뚜기가 그의 하프에 내려앉아, 끊어진 현의 소리를 대신하여 완벽한 음을 내주었고, 덕분에 그는 승리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노력(연주)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개입하여 조화를 회복시키는 신성한 은총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우리의 악기가 망가졌을 때, 우리는 절망 속에서 연주를 포기할 수도 있지만, 신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연주를 계속한다면, 하늘은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줄 기적의 메뚜기를 보내줄 것입니다.


신에게서 왕에게로, 찬미의 위계


이 모든 철학적 서곡의 끝에서, 저자는 마침내 이 논고의 본래 목적인 ‘왕들에 대한 찬가’로 돌아옵니다. 그는 자신 또한 불완전한 악기처럼 “힘의 부족”을 느끼지만, 이제 “우월하신 분(Superior One)”의 영감을 받아 왕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시작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찬미는 반드시 올바른 위계를 따라야 합니다. 그는 먼저 “가장 높으신 왕—만물의 신”에게서 노래를 시작하고, 그 다음에야 “그의 형상을 따라 왕권의 힘을 쥔” 지상의 왕들에게로 내려옵니다.


이는 헤르메스주의의 핵심적인 상응의 원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지상의 왕이 지닌 권위와 영광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왕이신 신의 권능을 대리하고 반영함으로써만 그 정당성을 얻습니다. 따라서 지상의 왕을 올바르게 찬미하는 것은, 곧 그를 통해 천상의 왕을 찬미하는 신성한 행위가 됩니다. 이처럼 이 논고의 첫 부분은, 우리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겪는 모든 고통과 한계를 신성한 예술가의 작품이라는 더 높은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불협화음은 신의 부재나 악의의 증거가 아니라,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기어코 아름다움을 피워내려는 신의 끊임없는 사랑과, 때로는 기적처럼 개입하는 그의 은총을 증거하는, 장엄한 교향곡의 일부인 것입니다.


2. 더 나은 분의 축복과 왕의 찬미에 관하여 (카논 11-16)


축복의 귀환


논고의 전반부가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을 ‘결함 있는 악기’라는 비유를 통해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이끌었다면, 후반부는 바로 그 불완전한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멜로디, 즉 ‘찬미와 축복의 노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노래는 일방적인 간청이 아니라,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온 은총의 강물을 다시 그 근원으로 되돌려 보내는 우주적 순환의 행위입니다. 저자는 이 과정을 “태양이, 자라나는 모든 것들의 유모로서, 처음 솟아오를 때, 그의 가장 강력한 손으로 그 산출물의 첫 열매들을 자신에게로 모으는 것”에 비유합니다. 태양의 빛을 받아 자라난 식물이 그 첫 열매를 다시 태양에게 바치듯이, 우리 또한 신의 지혜의 흐름을 받아, 그것을 다시 축복의 흐름으로 바꾸어 그 근원에게 되돌려 보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찬미는 결핍의 표현이 아니라, 충만함의 응답이며, 모든 것을 받은 자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경건한 제물입니다.


찬미의 불완전함, 그리고 그 필연성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한 신을 온전히 찬미할 수 있겠습니까? 저자는 이 근본적인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의 영광을 제대로 노래하기 위해서는 “일만 개의 혀와 목소리”가 필요할 것이며, 우리는 그 과업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들”과 같아서, 아버지의 위대함을 제대로 표현할 힘이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헤르메스주의의 심오한 역설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찬미가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서툰 옹알이로 부모에게 사랑을 표현할 때, 부모가 그 표현의 미숙함이 아니라 그 사랑의 진실함에 기뻐하듯이, 신 또한 우리의 미약한 찬미를 기꺼이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신의 영광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에 있으니, 곧 그가 그의 자녀들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이야말로 신의 완전함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가장 위대한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찬미의 행위는 신에게 무언가를 더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을 정렬(align)시키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신의 선하심과 권능을 향해 의식적인 찬미를 드릴 때, 우리의 영혼은 그 신성한 진동수와 공명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만물의 조화는 “사랑 그 자신에 의해” 이루어지며, 우리의 찬미는 우리를 다시 집으로 데려오는, 즉 신성한 근원과의 합일로 이끄는 길이 됩니다.


성스러운 아이콘으로서의 왕: 찬미의 실천


이러한 신을 향한 추상적인 찬미의 원리는, 이제 지상의 왕을 향한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매우 놀랍고도 실천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바로 “우리의 왕들로 시작하여, 그들을 대상으로 스스로를 연습함으로써, 찬미의 노래에 익숙해지고, 더 나은 분에 대한 경건한 봉사 속에서 스스로를 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상의 왕을 신성한 가르침을 위한 ‘교육적 도구’이자 ‘성스러운 아이콘(sacred icon)’으로 여기는 독특한 관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왕이신 신을 곧바로 찬미하고 경배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에, 우리는 먼저 눈에 보이는 왕, 즉 신의 권능을 지상에서 대리하는 그의 ‘이미지’를 통해 경배의 기술을 연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를 살아있는 신, 즉 태양신 라(Ra)의 아들이자 지상의 현현으로 여겼던 신성왕권(divine kingship) 사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시한, 선의 이데아를 관조한 철학자만이 이상적인 통치자가 될 수 있다는 ‘철인왕(Philosopher-King)’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헤르메스주의적 관점에서, 이상적인 왕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자가 아니라, 하늘의 질서를 땅에 구현하는 신성한 중재자입니다.


따라서 지상의 왕을 찬미하는 행위는 단순한 정치적 아첨이 아닙니다. 그것은 왕의 통치 속에서 드러나는 평화와 질서, 그리고 “평화를 위한 이성(logos)”의 힘을 관조함으로써, 그 배후에 있는 신성한 질서와 이성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인 훈련입니다.


이미지의 신성 마법(Theurgy)


논고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한 사상을 신성 마법(theurgy)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립니다. 저자는 “왕의 바로 그 조각상들은 가장 폭풍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평화로운 항구”가 되며, “왕의 모습 하나만 나타나도 승리를 얻고, 모든 시민에게 해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제16장에서 제시되었던, ‘형상(image)’이 그 원형의 힘을 나누어 가진다는 원리의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왕의 조각상이나 초상화는 단순한 돌이나 그림이 아니라, 왕이 상징하는 신성한 질서와 평화의 원리와 ‘감응(sympathy)’하는 마법적 연결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형상에 경의를 표하는 행위는, 그 형상을 통해 그 배후에 있는 실제적인 힘과 연결되고, 그 힘의 보호와 안정을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신성 마법의 의식이 됩니다. 이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이암블리코스가 체계화한 테우르기아의 핵심 원리, 즉 물질적 상징과 의식을 통해 신적인 힘을 불러내리고 그와 교감하는 기술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렇게 볼 때,「왕들에 대한 찬가」의 후반부는 개인의 영적 수행이 어떻게 사회적, 정치적 현실 속에서의 실천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심오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내면의 신성한 질서를 세우는 것이 외부 세계의 질서를 존중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지상의 왕을 통해 하늘의 왕을 섬기는 법을 배우고, 보이는 형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신성을 경배하는 법을 익힐 때, 비로소 우리의 삶 전체가 신을 향한 하나의 거대한 찬미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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