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트리스메기스투스: 오, 아스클레피오스여, 신께서 그대를 우리에게 데려오셨으니, 이는 그대가 신적인 담론을 듣게 하기 위함이다. 이 담론은 우리가 이전에 발설했거나 신성으로부터 영감받은 모든 것들 중에서도, 평범한 믿음의 경건함보다 더 신적인 것으로 보일 만한 담론이다. 만일 그대가 지성의 눈으로 이 말씀을 본다면, 그대의 온 마음은 모든 선한 것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만일, 실로, ‘다수(many)’가 ‘선(good)’이며, 그 안에 ‘전체(all)’가 있는 ‘하나(one)’가 아니라면 말이다. 실로 그 둘 사이의 차이는 그들의 일치 속에서 발견되니, ‘전체’는 ‘하나’의 것이요, 혹은 ‘하나’는 ‘전체’이다. 각각은 다른 하나에 너무나 밀접하게 묶여 있어, 어느 쪽도 그 짝으로부터 나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뒤따를 담론으로부터 그대가 부지런한 주의를 기울여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 아스클레피오스여, 그대는 잠시 나가서 들을 이를 불러오너라.
(그리고 그가 들어왔을 때, 아스클레피오스는 암몬 또한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세 번 위대하신 이가 말씀하셨다.)
트리스메기스투스: 암몬을 우리에게서 멀리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그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하듯이, 물리학에 관한 많은 것들과 윤리학에 관한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글로 적어두었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논고에 그대의 이름을 새길 것이다. 하지만 부디, 암몬 외에는 아무도 부르지 말라. 이토록 위대한 주제에 대한 가장 경건한 담론이 다수의 입장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신성의 온전한 위대함으로 넘쳐나는 논고를 군중의 지식에 공표하는 것은 불경한 마음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암몬 또한 거룩한 장소 안으로 들어왔고, 경건함과 신의 선하신 임재로 이제 네 명의 신성한 무리가 완전해졌을 때, 합당한 침묵 속에 경건하게 잠겨, 그들의 영혼과 마음이 헤르메스의 입술에 매달렸을 때, 이처럼 신성한 사랑이 말하기 시작했다.)
II
1. 트리스메기스투스: 오, 나의 아스클레피오스여, 모든 사람의 영혼은 불멸이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방식은 아니며, 어떤 이는 한 방식으로 또는 한 시간에, 어떤 이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하다. 아스클레피오스: 그렇다면, 오, 세 번 위대하신 분이시여, 각 영혼은 하나의 동일한 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트리스메기스투스: 오, 아스클레피오스여, 그대는 얼마나 빨리 이성의 참된 정신의 온전함에서 벗어났는가! 내가 ‘전체’는 ‘하나’이며, ‘하나’는 ‘전체’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모든 것이 창조되기 이전에 창조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지체들이 ‘전체’라는 점에서, 그가 부적절하게 ‘전체’라 불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논증에서, ‘하나-전체’이시거나, 혹은 스스로 ‘전체’의 제작자이신 그분을 명심하도록 하라.
2. 만물은 하늘에서 땅으로, 물로, 그리고 공기로 내려온다. 오직 불만이, 위로 향하기에, 생명을 준다. 아래로 향하는 것은 불에 종속된다. 더 나아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무엇이든 낳고(begetteth), 위로 흐르는 것은 무엇이든 기른다(nourisheth). 오직 땅만이, 그 자체로 머물기에, 만물의 수용자(Receiver)이며, 또한 그것이 받는 모든 속(屬)들의 복원자(Restorer)이다. 그러므로 이 전체(Whole)는, 그대가 기억하듯이, 그것이 전체의 것이라는 점에서, 다시 말해, ‘영혼’과 ‘세계’ 아래 본성에 의해 포용된 모든 것들은 영원한 흐름 속에 있으며, 그들의 모든 형상들의 다채로운 동등함에 의해 매우 다양하여, 수없이 잘 구별된 질의 종류들이 식별될 수 있으면서도, 모든 것이 하나로 보이고, ‘하나’로부터 ‘전체’가 비롯된다는 이 결합의 끈을 가지고 있다.
III
1. 그렇다면, 전체 코스모스가 형성되는 그것은 네 가지 원소, 즉 불, 물, 흙, 그리고 공기로 구성된다. 코스모스 자체는 하나요, 그 영혼은 하나이며, 신은 하나이시다. 이제 그대의 전부를, 그대가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대가 통찰력으로 숙달한 모든 것을 내게 빌려주어라. 신성의 이성(Reason of Divinity)은 그것과 같은 감각의 의도 없이는 알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폭포수의 홍수와 같아서, 모든 것을 삼키는 조수로 위에서부터 곤두박질치듯 내려온다. 그리하여 그 속도의 신속함으로 인해, 그것은 듣는 이들뿐만 아니라 바로 그 스승들의 주의력보다도 너무 빠르다.
2. 그러므로 영혼의 이성, 곧 로고스(Logos)는, 만물의 이성이며, 영원하다. 영혼 자체도 영원하며, 그 안에 이성(Logos)이 있는 한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영혼 안에 있으니, 이로써 영혼은 영원하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Logos)은 모든 인간들 가운데서 모든 면에서 그러하니, 그것은 영혼과 육체의 혼합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체가 필멸하는 것과 같이 필멸의 것으로 시작되지만, 첫 번째 마음(First Mind), 즉 신성한 이성(Logos)의 질을 향해 나아간다.
3. 오, 아스클레피오스여, 이 마음은 영혼 안에서 마치 거대한 나무의 뿌리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 뿌리는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않으며, 그 가지들을 사방으로 뻗어낸다. 그리고 그 가지들은 그대의 비유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풍성하고 끊임없는 열매들, 즉 우리의 행위들과 같다.
4.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며, 언제나 움직임과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운동과 생명의 양태와 방식은 각 영혼마다 운명에 따라 다르다.
5. 신과 아버지, 혹은 주님, 혹은 그가 불리기를 기뻐하시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시는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시자 근원이시며 권능이시다. 만물은 그의 의지(Will) 안에 있으며, 그 의지는 지고의 선(summum bonum)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앞으로도 주실 것이다. 그의 의지는 그 자신의 완전함이니, 그는 자신의 의지 안에서 완전하시고, 그가 원하시는 모든 것을 주신다.
IV
1. 오, 트리스메기스투스여, 세계(World)는 신의 이미지이며, 신은 의지이시다. 그리고 세계는 모든 선의 수용기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선하다. 세계는 모든 면에서 인간과 닮았다고 상상될 수 있다. 인간이 머리와 눈, 손과 발, 그리고 다른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듯이, 세계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인간처럼, 그것은 네 가지 원소, 즉 불, 물, 흙, 공기로 구성되어 있다.
2. 이 세계의 지성적 본질(intelligible essence), 즉 그것을 통해 세계가 알려지는 것은, 말하자면, 그것의 머리이며, 가장 순수한 빛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의 눈은 하늘의 빛나는 것들, 즉 신들이며, 그 정점에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밝히는 자, 즉 태양이 자리 잡고 있다. 세계는 하나의 구(sphere)이며, 그것의 모든 부분은 비어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지체들이 둥근 형태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 완전한 생명이다.
3. 신은 세계의 아버지요, 세계는 인간의 아버지이다. 인간은 신의 손자이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을 돌보시며, 세계는 인간을 사랑한다.
V
1.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신 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신이라 불리신다. 그는 만물을 만드시니, 스스로 존재하시며, 영원히 존재하시고, 다른 모든 것들을 낳으신다. 그는 결코 생성되지 않으셨고, 그 자신과 동등한 다른 이에 의해 생성되실 수도 없으며, 그의 의지는 결코 그 자신 밖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원하시며, 그가 원하시는 것을 만드신다. 그는 완전하시고, 그의 의지 안에서 완전하시며, 그가 만드시는 모든 것을 소유하신다.
2. 그의 의지는 결코 부족하지 않으며, 그는 완전하시다. 만일 그가 완전하시다면, 그는 부족함이 없으시다. 만일 그가 부족함이 없으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주시며 아무것도 받지 않으신다. 그는 만물이 존재하기를 원하시며, 그가 원하시는 대로 존재하게 하신다.
3. 그러므로 그가 만드시는 모든 것은 그가 원하시는 형상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가 원하시는 모든 것은 그의 육체 안에 존재한다. 그의 의지는 신성 그 자체이며, 그의 본질은 의욕하는 것이다.
VI
1. 이제 세계와 인간의 차이를 들어보아라. 세계는 신의 첫 번째 창조물이요, 인간은 두 번째이며, 세계 다음이다. 세계는 그 자체로 어떤 부분에서도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두 가지 부분, 즉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육체는 필멸하고 썩는다. 영혼은 신적인 마음 안에 거하며, 그 안에서 보존된다.
2. 그러므로 세계는 모든 형상과 종(種)들의 수용기이다. 세계는 질서이며, 그 질서 안에 있다. 인간은 세계 안에 있으며, 세계는 신 안에 있다. 인간은 세계의 일부이며, 세계는 신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신은 자신보다 먼저 계시며, 세계보다 먼저 계시고, 인간보다 먼저 계신다.
3. 이 모든 것은 신의 의지로부터 흘러나오며, 그의 권능과 본성에 따라 흐른다. 만물은 신 안에 있으며, 신에 의해 움직인다. 지성적 본질은 신적인 마음이며, 신적인 마음은 영원히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의지이며, 그 의지는 선함이다.
「완전한 담론: 아스클레피오스」 주해
1.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 지혜의 쇠퇴와 신들의 귀환
「완전한 담론: 아스클레피오스」는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의 다른 어떤 논고보다도 더 길고, 더 체계적이며, 더 구체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독특한 텍스트입니다. 라틴어로만 온전히 전해진 이 문헌은, 헤르메스주의의 우주론, 인간론, 구원론을 집대성하는 동시에, 당시의 사회와 종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미래에 대한 장엄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고 슬픈 울림을 남기는 부분은 바로 이집트, 즉 신들의 땅이 겪게 될 영적 쇠퇴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단순히 한 종교의 몰락을 애도하는 것을 넘어, 지혜가 사라진 시대의 영적 공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찾아올 신성한 복원(apocatastasis)의 희망을 노래하는, 시대를 초월한 묵시록적 비전입니다.
이집트, 하늘의 복사본
예언의 비극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헤르메스주의가 이집트라는 땅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헤르메스에게 이집트는 단순한 지상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복사본(copy of heaven)”이자, “우주 전체의 질서가 투사되고 옮겨진 성소”이며, “온 코스모스의 신전”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신전들은 하늘의 별자리를 본떠 지어졌고, 그들의 종교 의식은 우주의 리듬을 지상에서 재현하는 신성한 행위였습니다. 즉, 이집트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유일한 장소, 신들이 인간과 함께 거니는 지상의 천국이었습니다. 헤르메스는 “우리 조상들이… 신들의 본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그들의 신성한 의식 속에 도입하는 기술을 발명했다”고 말하며, 이집트 종교의 핵심이 바로 신성을 땅으로 불러내리는 신성 마법(theurgy)에 있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어둠의 시대: 신들의 떠남과 지혜의 죽음
그러나 헤르메스는 눈물을 흘리며, 이 영광스러운 신들의 땅에 닥쳐올 어두운 미래를 예언합니다. 그는 “오, 이집트여, 이집트여! 그대의 종교에는 오직 이야기만이 남을 것이며, 그 이야기조차 후손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돌에 새겨진 그대의 경건한 말들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탄식합니다. 신들은 더 이상 인간과 함께 거하지 않고 “하늘로 되돌아갈” 것이며, 이집트는 “신들과 천사들이 없는 과부”처럼 버려질 것입니다.
이 영적 공백의 시대에, 세상은 “스키타이인이나 인도인, 혹은 그와 비슷한 야만인들”에 의해 점령될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외국의 침략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영적인 가치를 모르는 ‘야만적인’ 물질주의와 무신론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을 상징합니다. 이 시대에, “경건함, 신심, 신성한 것들에 대한 숭배는 헛된 것으로 여겨져 비웃음당할 것”이며, 사람들은 “어둠을 빛보다 선호하고, 죽음을 삶보다 더 유익하게 여길 것”입니다. 진정한 구도자는 “미쳤다고 간주될 것”이고, 불경한 자는 “지혜롭다고 칭송받을 것”입니다. 이는 제9장 「사유와 감각에 관하여」에서 예고되었던, 그노시스를 얻은 자가 세상으로부터 박해받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이 영적 암흑기는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법은 무시되고, 세상은 온갖 악과 불경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땅은 더 이상 풍요로운 결실을 맺지 않고, 공기는 병들며, 바다는 오염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의 노쇠(senectus mundi)”의 징후이며, 우주적 질서 자체가 해체되는 종말의 시작입니다.
정화의 불과 새로운 창조: 아포카타스타시스(Apocatastasis)
이처럼 절망적인 예언의 끝에서, 헤르메스는 마침내 위대한 반전, 즉 신성한 개입과 복원의 희망을 제시합니다. 세상의 악이 그 극에 달했을 때, “만물의 제작자이자 아버지이신 주님”께서는 더 이상 이 혼돈을 방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 즉 선(the Good)”에 따라 악에 맞서실 것입니다.
그의 개입은 두 가지 강력한 정화의 힘, 즉 ‘물’과 ‘불’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는 “대홍수”를 보내 세상의 더러움을 씻어내거나, “가장 뜨거운 불”로 악의 뿌리를 태워버릴 것입니다. 이 정화의 대격변을 통해, 그는 “세상을 다시 그 고대의 아름다움으로 되돌려 놓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헤르메스주의적 ‘아포카타스타시스’, 즉 만물이 그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복원되는 우주적 순환의 완성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 이후, 세상은 다시 한번 “숭배와 경외의 가치가 있는” 신성한 공간이 될 것이며, 사람들은 “자연의 제작자이자 복원자이신 그를 끊임없는 찬미와 축복으로 노래할 것”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종말론적 예언은 단순한 비관주의나 운명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토아 철학의 우주적 순환론과 영지주의의 묵시록적 비전이 결합된, 장엄한 역사 철학입니다. 이 예언은 우리에게,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바로 신들이 떠나고 지혜가 쇠퇴한 ‘어둠의 시대’일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말라고 속삭입니다. 모든 쇠퇴와 죽음은 더 위대한 재탄생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며, 세상의 악이 그 정점에 달했을 때, 신성한 정화의 불길은 어김없이 타올라, 세상을 다시 그 본래의 신성한 아름다움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적 순환의 법칙을 이해하는 자는, 시대의 어둠에 절망하지 않고, 다가올 새로운 새벽을 준비하는 지혜의 파수꾼이 될 것입니다.
2. 인간, 신을 만드는 자: 신성 마법(테우르기아)의 비밀
「완전한 담론: 아스클레피오스」는 헤르메스주의의 철학적 사변을 넘어, 그 실천적인 비의(秘儀)의 영역으로 우리를 깊숙이 인도합니다. 그 여정의 정점에서 우리는 서양 정신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대담하고도 충격적인 선언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신의 기술을 통해 “신들을 만드는 자(maker of the Gods)”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헤르메스는 “사람이 신들의 본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재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라고 물으며,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을 뛰어넘는 위대함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표면적으로 이는 신성모독적인 우상숭배의 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우주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심오한 세계관과, 그 안에서 신적인 힘을 불러내리고 소통하는 ‘신성 마법(Theurgy, 테우르기아)’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감응의 원리: 살아있는 거미줄로서의 세계
인간이 어떻게 신을 만들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헤르메스주의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우주는 생명 없는 물질들의 무작위적인 집합이 아니라, 모든 부분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교감하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입니다. 이는 스토아 철학의 ‘감응(sympathy, sympatheia)’의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주는 마치 거대한 거미줄과 같아서, 한쪽 끝의 미세한 떨림이 거미줄 전체에 전달되듯이, 우주의 한 부분에서 일어난 일은 다른 모든 부분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감응의 원리는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As above, so below)’라는 헤르메스주의의 대원칙을 통해 더욱 구체화됩니다. 하늘의 별들과 행성들(대우주)은 지상의 광물, 식물, 동물들(소우주)과 각각 고유한 상응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특정한 약초는 목성의 치유력을, 특정한 보석은 화성의 투쟁적 에너지를, 특정한 동물은 금성의 사랑의 기운을 자신 안에 응축하고 있습니다. 신성 마법이란 바로 이 우주적 상응 관계의 비밀을 파악하고, 지상의 물질들을 올바르게 조합하고 배열함으로써, 하늘의 신성한 힘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신성한 기술입니다.
신을 만드는 기술: 테우르기아 의식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헤르메스는 ‘신을 만드는’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두 단계의 신성한 예술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육체의 창조’입니다. 인간 조상들은 “신들을 만드는 기술을 발명”했는데, 그들은 먼저 불러내고자 하는 특정 신의 힘과 감응하는 지상의 물질들—적절한 약초, 보석, 향료 등—을 세심하게 선택하여 혼합하고, 그것으로 신상(神像)을 빚었습니다. 이 신상은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라, 하늘의 신성한 힘이 내려와 머물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되고 축성된, 일종의 ‘영적 안테나’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영혼의 강림’입니다. 헤르메스는 “인간은 영혼을 만들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대신, 그는 자신이 만든 신성한 육체에 “다이몬들이나 천사들의 영혼을 불러들여” 그 안에 머물게 합니다. 이 ‘불러들임’은 올바른 주문과 기도, 즉 우리가 「아스클레피오스가 암몬 왕에게 전하는 정의」에서 보았던 “행위로 가득 찬 소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의식을 통해, 조각상은 더 이상 비활성적인 물질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가 거주하며 예언을 하고 병을 치유하는 등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살아있는 힘의 중심지가 됩니다. 이 과정은 고대 이집트의 사제들이 신상의 ‘입을 여는 의식(Opening of the Mouth ceremony)’을 통해 조각상에 신의 영(Ka)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었던 실제 종교 의식의 철학적 재해석입니다.
신성 마법과 흑마법: 결정적 차이
이러한 가르침은 자칫 신들을 조종하여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위험한 흑마법(Goetia)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이암블리코스(Iamblichus)가 명확히 구분했듯이, 테우르기아는 그 목적과 방향에서 흑마법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흑마법의 목적이 하위의 영들을 강제하여 세속적인 이득을 얻는 것이라면, 테우르기아의 목적은 구도자 자신을 정화하고 신성한 의식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더 높은 신적인 존재들과 연결시키고 궁극적으로 신과의 합일(henosis)에 이르는 것입니다.
헤르메스주의에서 ‘신을 만드는’ 행위는 신을 노예로 부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단절을 회복하고, 지상에 신성한 힘이 흘러넘치는 통로를 만들기 위한 사제적(司祭的)인 봉사입니다. 연금술사는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이제 신을 모방하여 스스로 ‘작은 창조주’가 되어, 불완전한 물질세계 속에 신성의 현존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공동-창조주로서의 인간
‘인간, 신을 만드는 자’라는 대담한 선언은 헤르메스주의 인간관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포이만드레스」에서 원초적 인간은 ‘창조하고 싶다’는 신성한 열망 때문에 물질계로 하강했습니다. 테우르기아는 바로 그 창조적 잠재력의 가장 완전한 실현입니다. 이 가르침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신의 자비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미약한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는 우주의 비밀스러운 법칙을 이해하고, 그 법칙을 사용하여 하늘의 힘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신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능동적인 ‘공동-창조주(co-creator)’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신성한 잠재력을 완전히 깨닫고 실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헤르메스주의적 구도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영광의 경지입니다.
3. 만물의 상호연결성과 보편적 사랑
「완전한 담론: 아스클레피오스」는 지혜의 쇠퇴에 대한 비통한 예언과 인간이 신을 만드는 대담한 신성 마법의 비밀을 거쳐, 마침내 모든 헤르메스주의 가르침이 뿌리내리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토양으로 우리를 이끌고 돌아옵니다. 그 토양은 바로, 이 광대한 우주가 서로 분리된 개체들의 무작위적인 집합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는 ‘만물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통찰입니다. 이 최종적인 비전 속에서, 우주론은 윤리학이 되고, 앎(Gnosis)은 사랑(Agape)이 되며, 구도자는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자리가 어디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주적 유기체: ‘만물은 하나다’
이 논고의 처음부터 끝까지, 헤르메스는 ‘만물은 하나(All is One)’라는 진리를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지고의 신은 “전체(All)이시면서 하나(One)이시고, 하나이시면서 전체이시니, 만물의 충만함(Fullness)이 하나이며 하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르침의 최종적인 귀결은 “그것들(만물) 모두는 신의 부분들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 모두가 부분들이라면, 신은 전체이십니다”라는 장엄한 선언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신이 세계 바깥에서 세계를 다스린다는 이원론적 신관을 완전히 넘어서는, 심오한 범재신론(panentheism)적 세계관입니다. 우주는 신이 만든 작품일 뿐만 아니라, 신의 살아있는 몸 그 자체입니다. 하늘의 별, 지상의 인간, 이름 없는 들풀 하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거대한 신의 유기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이자 기관입니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가 말했듯이, 이 우주적 생명체 안에서는 발가락 끝의 작은 상처가 온몸으로 느껴지듯이, 한 부분에서 일어난 일은 반드시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감응(sympathy, sympatheia)’이라고 불렀던 이 우주적 공감의 원리야말로, 헤르메스주의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사랑과 봉사의 위계
이러한 상호연결성의 원리는 필연적으로 우주적 윤리의 토대가 됩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신, 천상의 신들, 다이몬, 그리고 인간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위대한 사슬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 위계는 지배와 복종의 사슬이 아니라, 돌봄과 책임의 사슬입니다. “더 높은 자들은 더 낮은 자들을 책임집니다. 신들은 인간을 돌보고, 인간은 비이성적인 동물들을 돌보며, 신은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이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한 소명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다른 동물들보다 더 높은 이성적 영혼을 부여받은 이유는, 그들을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보다 낮은 존재들을 돌보고, 그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도록 돕는 ‘선한 목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돌보는 행위는, 신들이 인간을 돌보는 신성한 섭리를 지상에서 모방하고 실천하는 가장 경건한 의무가 됩니다. 이처럼, 환경 윤리와 생명 존중 사상은 이미 수천 년 전 헤르메스주의의 가르침 속에 그 철학적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앎에서 사랑으로: 구원의 완성
만물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진정한 앎(Gnosis)은, 필연적으로 모든 존재를 향한 ‘보편적 사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나와 타인,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 신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다른 표현이라면, 타인에게 가하는 상처는 곧 나 자신에게 가하는 상처이며, 신의 몸을 훼손하는 신성모독적인 행위가 됩니다. 반대로, 타인을 향한 자비와 사랑은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우주 전체의 조화에 기여하는 가장 신성한 행위가 됩니다.
이 지점에서 헤르메스주의 구원론의 심오함이 드러납니다. 구원은 단순히 개인의 영혼이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나’라는 분리된 에고의 환상에서 깨어나, 내가 우주 전체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머리로 얻은 차가운 앎(Gnosis)이, 가슴을 통해 뜨거운 사랑(Agape)으로 변모할 때, 비로소 구원은 완성됩니다.
이 논고는 “인류의 의무는 숭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을 향한 최고의 숭배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화려한 제물을 바치거나 복잡한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몸인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수된 의무
결국 「완전한 담론: 아스클레피오스」는, 어두운 예언과 신비로운 마법의 가르침을 넘어, 우리를 가장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진리로 되돌려 놓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사랑과 생명의 끈으로 연결된, 신이라는 위대한 존재의 소중한 일부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우리의 삶을 분리와 갈등이 아닌 연결과 조화, 그리고 사랑의 실천으로 채워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의무이자 가장 큰 축복입니다. 이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지혜의 쇠퇴를 막고, 떠나간 신들을 다시 이 땅으로 불러들이며, 우리 자신과 세계를 그 본래의 신성한 아름다움으로 복원하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창조주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