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프리메이슨과 악마 숭배의 차이

by DrLeeHC

제4부: 기독교와 프리메이슨: 악마 숭배 논쟁


제14장: 프리메이슨과 악마 숭배의 차이


14.1 프리메이슨의 "최고 건축자" vs. 사탄교의 루시퍼


음모론이라는 거대한 안갯속에서, 모든 길은 결국 하나의 치명적인 오해로 귀결되곤 합니다. 그것은 바로 프리메이슨이 그들의 의식 속에서 경배하는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 (The Great Architect of the Universe)'가, 사실은 사탄교나 루시퍼리안 (Luciferianism)이 숭배하는 루시퍼 (Lucifer)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끔찍한 등식(等式)입니다. 이 두 개의 이름, 건축가와 루시퍼는,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를 비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을 깊이 들여다볼 때 우리는 그들이 결코 만날 수 없는, 서로 다른 우주에 속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두 개념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악마 숭배라는 낡은 혐의의 심장을 꿰뚫는 가장 예리한 지성의 칼날입니다.


우리가 이미 여러 번 탐사했듯이, 프리메이슨의 '위대한 건축가'는 특정 종교의 신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신앙을 담을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비어있는 '신성한 그릇'과도 같습니다. 이 개념은 우주가 무의미한 혼돈의 산물이 아니라, 어떤 지성적이고 질서정연한 원리에 의해 창조되고 유지된다는 최소한의 믿음만을 요구합니다. 기독교인은 이 건축가를 성부(聖父) 하나님으로, 유대인은 야훼로, 그리고 이신론자는 우주를 창조한 이성적 원리로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위대한 건축가'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규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믿을 것인가에 대한 관용의 원칙입니다. 그 본질은 포용성보편성에 있습니다. 프리메이슨의 목표는 이 위대한 건축가가 세운 우주적 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자기 자신이라는 불완전한 돌을 갈고닦아, 사회라는 더 큰 건축물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길은 순응조화를 향한 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앞선 장에서 살펴본 실제 사탄교와 루시퍼리안의 철학 속에서, 사탄 (Satan)과 루시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안톤 라베이 (Anton LaVey)의 사탄교에서 사탄은 숭배의 대상이 되는 외부의 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동물적 본능과 이기심, 그리고 사회적 위선에 저항하는 '반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은유입니다. 그들의 길은 외부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 욕망을 극한까지 긍정하고 실현하는 자기중심성의 길입니다.


루시퍼리안의 철학 속에서 루시퍼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맹목적인 신앙과 독단적인 권위라는 어둠에 맞서, 인류에게 금지된 지식의 을 가져다준 영웅적인 계몽의 상징으로 그려집니다. 그들의 목표는 외부의 창조주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지식의 탐구를 통해 자기 자신 안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스스로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자기 신격화 (Self-Deification)를 향한 길입니다. 그들의 길은 조화가 아닌, 기존 질서에 대한 영원한 도전상승의 길입니다.


이제 이 두 세계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보이십니까? 프리메이슨의 '위대한 건축가'는 우주의 질서조화를 상징하는 초월적 원리입니다. 반면에 사탄과 루시퍼는 인간 내면의 욕망반항, 그리고 지성을 상징하는 내재적 원리입니다. 프리메이슨의 목표가 위대한 건축가의 설계도에 따라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면, 사탄교와 루시퍼리안의 목표는 자기 자신의 의지를 유일한 설계도로 삼아 세계를 정복하거나 초월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건축가'와 '루시퍼'를 동일시하는 것은, 평화로운 성전을 짓는 건축가의 설계도와, 기존의 모든 성전을 불태우고 새로운 탑을 쌓으려는 혁명가의 선언문을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두 개념은 그 목적과 본질,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프리메이슨을 악마 숭배와 연결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바로 이 명백한 철학적 차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한 깊은 무지에서 비롯된, 지적인 신기루에 불과한 것입니다.


14.2 의식과 상징의 오해: 비교 분석


프리메이슨을 악마 숭배와 연결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의 근본적인 오류, 즉 두 세계가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은 보지 못한 채, 그저 몇몇 유사한 단어에만 집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프리메이슨과, 대중문화 속에 그려지거나 실제 사탄교가 행하는 의식들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제단과 상징, 그리고 극적인 드라마라는 공통된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형식이라는 그릇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 즉 그 의식과 상징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방향성은, 빛과 어둠처럼 서로 정반대의 극점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바로 제단(Altar)이라는 신성한 공간의 의미에서 비롯됩니다. 프리메이슨의 로지 중앙에 놓인 제단은, 『성스러운 경전, Volume of the Sacred Law』을 올려두기 위한 장소입니다. 그 위에는 직각자와 컴퍼스가 함께 놓여, 인간의 도덕적, 영적 삶이 신성한 진리의 빛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상징합니다. 즉, 프리메이슨의 제단은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가 제시한 우주적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인간이 스스로를 겸손히 낮추고 가르침을 구하는 상승(Ascension)과 건설(Construction)의 공간입니다. 반면에, 레오 탁실 (Léo Taxil)이 묘사했거나 안톤 라베이 (Anton LaVey)가 실제로 연출했던 사탄교의 의식 속 제단은 정반대의 목적을 가집니다. 특히 흑미사 (Black Mass)에서 나체의 여성이 제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영적인 순수성과 하늘의 가치를 조롱하고, 인간의 육체적 본능과 땅의 쾌락이야말로 유일한 진실임을 선언하는, 가장 강력한 전복(Inversion)과 모독(Blasphemy)의 상징입니다. 하나는 신성을 향해 열려있는 창이며, 다른 하나는 신성을 향해 굳게 닫힌 문인 것입니다.


상징의 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흔히 악마의 상징으로 알려진 오각성(Pentagram)은, 본래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부터 건강과 완전함을 상징해 온 신성한 기하학적 도형입니다. 프리메이슨과 관련된 단체인 이스턴 스타 (Order of the Eastern Star)에서 사용되는, 하나의 꼭짓점이 위를 향한 오각성은, 영(Spirit)이 불, 물, 흙, 공기라는 네 가지 물질적 원소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다스리는 영적 질서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라베이 사탄교가 공식적인 상징으로 채택한, 두 개의 꼭짓점이 위를 향한 역(逆)오각성은, 바로 이 질서를 의도적으로 뒤집은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가치가 두 개의 뿔로 상징되는 육체적 욕망과 지상의 쾌락 아래 짓밟힌 상태, 즉 전통적인 도덕률에 대한 완전한 반역을 상징합니다. 두 개의 상징은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방향성을 통해 전혀 다른 우주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의 차이는, 두 세계가 행하는 의식 드라마의 핵심 서사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프리메이슨의 제3등급 의식은, 위대한 장인 히람 아비프 (Hiram Abiff)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충성과 절의, 그리고 영혼의 불멸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가르치는 건설적인 신화입니다. 입문자는 이 상징적인 죽음을 통해 자신의 낡은 자아를 버리고, 형제들의 도움으로 더 높은 차원의 진리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변성의 드라마를 체험합니다. 반면에, 흑미사와 같은 의식의 본질은 패러디(Parody)와 해체(Deconstruction)에 있습니다. 그들은 가톨릭 미사의 가장 신성한 요소들, 즉 기도문과 성체, 그리고 십자가를 가져와 의도적으로 조롱하고 모독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새로운 진리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진리가 가진 권위를 파괴하고, 그 파괴의 과정 속에서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가 잃어버린 성전을 재건하려는 건축가의 드라마라면, 다른 하나는 기존의 모든 성전을 불태우려는 혁명가의 드라마인 셈입니다.


프리메이슨과 악마 숭배의 의식과 상징은, 비록 표면적으로 몇몇 유사한 형식을 차용할 수는 있으나, 그 영혼의 방향성은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프리메이슨의 모든 상징과 의식은, 인간을 더 높은 우주적 질서와 '연결(Connect)'시키려는 구심력(求心力)으로 작용합니다. 반면에, 악마 숭배의 모든 상징과 의식은, 인간을 그 모든 질서로부터 '단절(Disconnect)'시키려는 원심력(遠心力)으로 작용합니다. 이 근본적인 방향성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겉모습의 유사성만을 가지고 두 세계를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오해의 가장 깊은 뿌리라 할 수 있습니다.


14.3 기독교 신학적 비판의 오류


프리메이슨을 향한 기독교, 특히 그 가장 보수적인 신학 체계의 비판은, 단순한 오해나 감정적인 반감을 넘어, 일견 정교하고도 체계적인 논리의 외피를 두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프리메이슨의 상징과 철학의 조각들을 자신들의 신학적 틀 안에 가져와 분석하고, 마침내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이단(異端)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걸음 물러나 그 비판의 논리 자체를 면밀히 들여다볼 때, 우리는 그 견고해 보이는 성벽이 실은 몇 가지 근본적인 철학적, 해석학적 오류라는 모래 위에 세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오류는 바로 상징을 우상으로, 비유를 교리로 착각하는 문자주의적 오류입니다. 기독교 신학, 특히 교조주의적 전통은 명문화된 경전과 확고한 교리를 그 중심에 둡니다. 그들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선언적입니다. 하지만 프리메이슨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상징적이고 알레고리적입니다.


프리메이슨은 회원들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리를 주입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직각자나 컴퍼스, 빛과 어둠과 같은 보편적인 상징들을 제시하고, 각자가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도덕적, 영적 의미를 찾아가도록 유도할 뿐입니다. 신학적 비판은 바로 이 언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프리메이슨이 전시안 (All-Seeing Eye)을 사용하는 것을, 문자 그대로 눈 모양의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의 섭리나 양심의 성찰을 상기시키기 위한 사유의 도구이지, 결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비둘기를 보며, 기독교인들이 새를 숭배한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은 해석학적 폭력입니다.


두 번째 오류는, 이러한 문자주의적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신학적 거짓 등치 (False Equivalence)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맥락과 의미를 가진 두 개의 개념을, 표면적인 유사성만을 근거로 동일한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논리적 비약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리메이슨의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를 영지주의 (Gnosticism)의 사악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 (Demiurge)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비판자들은 '창조'라는 행위의 유사성에만 주목하여, 프리메이슨이 기독교의 참된 신이 아닌, 불완전한 물질 세계를 창조한 하위의 신을 숭배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두 개념의 본질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입니다.


프리메이슨의 '건축가'는 모든 신앙을 포용하기 위한 열려있는 철학적 원리인 반면, 데미우르고스는 진정한 신성에 대립하는 닫혀있는 신화적 존재입니다. 하나는 관용의 상징이며, 다른 하나는 무지의 상징입니다.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외과 의사의 메스와, 길거리에서 행인을 위협하는 강도의 칼을, 단지 '날카로운 쇠붙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 오류는, 프리메이슨의 보편주의 (Universalism)를 종교적 무관심주의 (Indifferentism)로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이 모든 종교의 신실한 신자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비판자들은 그들이 "모든 종교는 똑같으며, 따라서 어떤 종교도 진리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프리메이슨의 관용 정신에 대한 근본적인 왜곡입니다.


프리메이슨은 각 종교의 고유한 진리나 가치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각자가 자신의 신앙 안에서 진실하게 추구하는 신성의 빛은, 비록 그 이름과 형태는 다를지라도, 결국에는 하나의 위대한 근원에서 비롯된다는 신비주의적 통찰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보편주의는 진리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일 수 있다는 깊은 존중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모든 색깔이 결국에는 하나의 백색광에서 비롯됨을 이해하는 것이지, 모든 색깔이 그저 무의미한 회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프리메이슨을 향한 많은 기독교 신학적 비판들은, 사실 프리메이슨이라는 실제 대상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틀이라는 안경을 통해, 상징을 우상으로, 철학적 비유를 이단의 교리로, 그리고 관용을 무관심으로 왜곡하여 비친 허상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판은 프리메이슨의 본질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비판자 자신들의 신학적 배타성과 해석학적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슬픈 지적 거울이 되고 말았습니다.


14.4 현대의 그림자들: 오해받는 엘리트와 비밀 의식


14.4.1 보헤미안 클럽과 '근심의 화장' 의식


프리메이슨을 향한 악마 숭배라는 혐의가 단지 과거의 유령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새로운 숙주를 찾아 헤매는 강력한 신화임을 증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캘리포니아의 울창한 레드우드 숲속 깊은 곳에서 매년 여름 벌어지는 비밀스러운 제전(祭典)일 것입니다. 그곳은 보헤미안 그로브 (Bohemian Grove)라 불리며, 그곳에 모이는 이들은 보헤미안 클럽 (Bohemian Club)이라는, 미국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영향력 있는 엘리트 집단의 회원들입니다. 전직 대통령과 거대 기업의 총수, 그리고 최고위급 정치가들이 세속의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2주간의 야영을 즐기는 이 비밀 캠프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중의 호기심과 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의혹의 심장부에는, 캠프의 시작을 알리는 기이하고도 장엄한 밤의 의식, 바로 '근심의 화장 (Cremation of Care)'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클럽의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이 의식은 지극히 상징적인 연극입니다. 회원들은 캠프 첫날 밤, 거대한 호숫가에 세워진 약 12미터 높이의 거대한 올빼미 석상 앞에 모입니다. 고대부터 지혜의 상징이었던 이 올빼미 앞에서, 그들은 '근심 (Dull Care)'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인간 형상의 허수아비를 불태웁니다. 이것은 2주간의 캠프 기간 동안, 세상의 모든 걱정과 책임감, 그리고 근심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오직 순수한 형제애와 예술적 자유 속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겠다는 상징적인 선언입니다. 그들에게 이 의식은, 문명이라는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정화(淨化) 의례인 셈입니다.


하지만 이 비밀스러운 숲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자들이 모여, 거대한 올빼미 우상 앞에서 무언가를 불태운다는 그 이미지는, 외부 세계의 눈에는 전혀 다른, 훨씬 더 사악한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의심에 불을 지핀 결정적인 계기는 2000년, 음모론자인 알렉스 존스 (Alex Jones)가 비밀리에 그로브에 잠입하여 이 의식을 촬영하고 세상에 공개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의 흐릿하고 흔들리는 영상 속에서, '근심의 화장'은 더 이상 상징적인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검은 로브와 붉은 로브를 입은 인물들이 횃불을 들고 행진하고, 불타는 허수아비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음향 효과가 더해진 이 영상은, 영락없는 고대의 이교도(Pagan)식 '모의 인간 희생 제사'처럼 보였습니다. 존스는 이 거대한 올빼미가 바로 성서에 등장하는, 아이를 제물로 받았다는 가나안의 신 몰렉 (Moloch)이며, 이 의식은 바로 그 악마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숭배 행위라고 폭로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음모론의 상상력은 가장 끔찍하고도 원초적인 공포의 영역으로 비약합니다. '모의' 희생 제사라는 개념은, 곧바로 "그들이 불태우는 것이 정말로 허수아비일까? 그것은 사실 진짜 인간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감추기 위한 위장이 아닐까?"라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의심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 의심은, 우리 사회의 가장 깊은 곳에 잠재된 최악의 공포, 즉 '아이들에 대한 폭력'이라는 신성불가침의 금기와 결합했습니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자라나, 보헤미안 그로브는 이제 단순한 엘리트들의 휴양지가 아니라, 매년 실종된 아이들을 납치해 와 거대한 올빼미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인신공양(人身供養)의 현장이라는 끔찍한 루머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보헤미안 클럽을 둘러싼 악마 숭배와 아동 희생 제사라는 루머는, 그들의 비밀스러운 의식이 대중의 원초적인 공포와 만나 어떻게 최악의 형태로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 연구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아이를 제물로 바쳤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밀을 가진 엘리트 집단'이, '이교적인 의식'을 통해, '인간 형상의 무언가'를 불태운다는 몇 가지 사실의 조각만으로도, 대중의 상상력은 그 빈 공간을 가장 끔찍한 이야기로 채워 넣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현대판 '피의 비방 (Blood Libel)'은, 곧이어 프리메이슨이라는, 훨씬 더 오래되고 거대한 비밀결사의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모든 비밀결사는 결국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악마 숭배자들이라는, 거대하고도 부당한 신화를 강화하는 데 사용되게 됩니다.



14.4.2 스컬 앤 본즈와 예일 대학교의 '무덤'


만약 보헤미안 클럽이 이미 사회의 정점에 오른 기성 권력자들의 비밀스러운 휴양지라면, 스컬 앤 본즈 (Skull and Bones)는 바로 그 권력의 정점으로 올라갈 미래의 지배자들을 길러내는, 가장 오래되고도 악명 높은 비밀의 요람입니다.


1832년 예일 대학교에서 윌리엄 헌팅턴 러셀 (William Huntington Russell)과 알폰소 태프트 (Alphonso Taft)에 의해 설립된 이 단체는, 매년 단 15명의 4학년 학생만을 신입 회원으로 선발하는 극도의 엘리트주의를 자랑합니다. '본즈맨 (Bonesmen)'이라 불리는 그 회원 명단은, 지난 200년 동안 미국의 역사를 움직여 온 인물들의 계보와 거의 일치합니다. 그 안에는 여러 명의 미국 대통령(조지 H. W. 부시와 조지 W. 부시 부자 포함)과 국무장관, CIA 국장, 그리고 월 스트리트의 가장 강력한 금융가들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대학 동아리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인재 사관학교처럼 보입니다.


이들의 비밀주의는 보헤미안 클럽을 능가합니다. 예일 캠퍼스 한복판에 자리한, 창문 하나 없는 이들의 클럽하우스는 '무덤 (The Tomb)'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외부 세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용기를 내어 조직을 탈퇴했거나 비밀을 폭로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기괴한 입단식의 일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입 회원은 관 속에 누워 자신의 모든 성적(性的) 경험을 다른 형제들 앞에서 상세하게 고백해야만 하는 의식을 거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조직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일종의 상징적인 죽음과 재탄생의 의례입니다. 또한, 클럽하우스 내부는 나치의 상징물과 해골, 그리고 뼈들로 가득 장식되어 있으며, 전설적인 아파치족 추장 제로니모 (Geronimo)의 두개골을 훔쳐와 보관하고 있다는 끔찍한 루머에 휩싸여 있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컬 앤 본즈는 프리메이슨 및 일루미나티 (Illuminati)와 하나의 거대한 음모론적 네트워크로 연결됩니다. 음모론의 서사 속에서, 이 조직은 18세기에 유럽에서 활동했던 일루미나티의 미국 지부, 즉 '챕터 322 (Chapter 322)'로 규정됩니다. 그 근거는 그들의 로고에 새겨진 숫자 '322'인데, 이는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 (Demosthenes)가 독약을 마시고 사망한 기원전 322년을 상징하며, 그가 세운 고대의 비밀결사로부터 자신들의 기원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음모론자들은 이 숫자 '322'가 독일 일루미나티와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나타내는 암호라고 주장합니다.


이 서사 속에서, 스컬 앤 본즈는 신세계질서 (New World Order)를 이끌어갈 핵심 인재를 조기에 발탁하고 양성하는 '인재 양성소'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예일 대학교라는 최고의 학문 기관에서, 그들은 가장 명석하고 야망 있는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평생에 걸친 비밀의 유대로 묶습니다. 그리고 이 '본즈맨'들은 졸업 후 각자의 분야, 즉 정치, 금융, 정보기관, 그리고 언론계의 최고위직으로 진출하여, 마치 거대한 체스판 위의 말들처럼, 보이지 않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신세계질서의 수립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와 민주당의 존 케리 (John Kerry)가 모두 스컬 앤 본즈의 동문이었다는 사실은, 음모론자들에게 민주주의 선거 자체가 이미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벌어지는 잘 짜인 연극에 불과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스컬 앤 본즈는 그들의 극단적인 비밀주의와 막강한 엘리트 네트워크 때문에, 현대판 일루미나티라는 오해를 받기에 가장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어떤 이념을 공유하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부족하지만, '가장 똑똑한 자들이,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서, 가장 기괴한 의식을 통해, 평생의 유대를 맹세한다'는 그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대중의 상상력은 그들을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의 계보를 잇는, 신세계질서의 가장 위험한 설계자들로 지목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14.4.3 프리메이슨과의 연결고리: 왜 이들이 프리메이슨으로 오해받는가


우리는 보헤미안 클럽 (Bohemian Club)의 기괴한 의식과 스컬 앤 본즈 (Skull and Bones)의 엘리트주의적 비밀을 각각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음모론의 세계에서, 이들은 결코 개별적인 존재로 남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리듯, 필연적으로 훨씬 더 오래되고 거대한 이름, 바로 프리메이슨이라는 원형적인 그림자 속으로 흡수되고 맙니다. 왜 캘리포니아의 숲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리고 예일 대학교의 낡은 건물 안에서 행해지는 의식이, 결국에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프리메이슨의 죄로 귀결되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이 모든 집단이 대중의 눈에 비치는 몇 가지 거부할 수 없는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으며, 음모론적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흩어져 있는 점들을 하나의 거대한 별자리로 연결하려는 강력한 충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이자 가장 명백한 연결고리는 바로 회원 구성의 중첩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대통령이나 고위 관료, 그리고 재계의 거물들 중에는 프리메이슨이면서 동시에 보헤미안 클럽이나 스컬 앤 본즈의 회원이기도 한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음모론의 관점에서,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모든 비밀결사가 사실은 하나의 거대한 피라미드 구조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들에게 스컬 앤 본즈는 인재를 양성하고, 프리메이슨은 그들을 중간 관리자로 훈련시키며, 보헤미안 클럽은 최상위 엘리트들이 모여 최종적인 계획을 논의하는, 일종의 단계별 시스템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한 사람이 대학 동문회에도 속해 있고, 지역 로터리 클럽에도 가입했으며, 주말 골프 클럽의 회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가지고, 이 세 단체가 모두 세계 정복을 위해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논리적 비약입니다.


두 번째 공통분모는, 우리가 이미 여러 번 탐사했던, 비밀주의상징적 의식이라는 외형적 유사성입니다. 굳게 닫힌 문, 외부인은 알 수 없는 입단식, 그리고 해골이나 올빼미와 같은 기이한 상징의 사용은, 이 모든 단체들이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강력한 인상을 줍니다. 대중의 눈에, '무덤 (The Tomb)' 안에서 관 속에 눕는 행위나, 거대한 올빼미 앞에서 허수아비를 태우는 행위는, 프리메이슨 로지에서 눈이 가려진 채 히람 아비프 (Hiram Abiff)의 죽음을 체험하는 행위와 그 본질적인 구조가 동일해 보입니다. 그들은 각 의식이 가진 고유한 역사적 맥락과 철학적 의미의 차이를 구분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이 모든 기이한 행위들을 '악마 숭배'와 '이교적 의식'이라는 단 하나의 포괄적인 딱지 아래 뭉뚱그려 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오해를 완성하는 것은 바로 음모론적 사유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특징, 즉 모든 것을 연결하려는 편집광적인 충동입니다. 음모론의 세계관은 우연이나 복잡성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은 반드시 보이지 않는 단일한 원인에 의해 통제되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상상력 속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밀결사들은 결코 서로 경쟁하거나 무관한 독립적인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하나의 거대한 지휘 체계 아래 움직이는, '음모의 네트워크'를 구성해야만 합니다. 이 거대한 서사 속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크며, 가장 널리 알려진 프리메이슨은 자연스럽게 이 모든 네트워크의 '몸통'이자 '총본부'의 역할을 부여받게 됩니다. 보헤미안 클럽이나 스컬 앤 본즈가 저지른다고 '의심되는' 모든 죄악은, 결국 그들의 상위 조직인 프리메이슨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보헤미안 클럽과 스컬 앤 본즈가 프리메이슨으로 오해받는 것은, 그들 사이에 실제적인 조직적, 이념적 연결고리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모든 단체들이 공유하는 엘리트주의, 비밀주의, 그리고 상징주의라는 외형적 특징이, 모든 것을 하나의 거대한 음모로 꿰어 맞추려는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화학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프리메이슨은 자신들이 낳지도 않은 현대의 그림자들의 죄까지도 모두 뒤집어쓴 채, 모든 비밀결사의 원형이자 모든 음모의 최종적인 배후라는, 부당하고도 거대한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14.5 프리메이슨의 도덕적 목표와 사탄교의 차이


우리가 지금까지 두 세계의 신(神) 개념과 상징, 그리고 의식의 외형적 차이를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그 모든 것의 귀결점, 즉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삶의 목적도덕적 목표라는 가장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하나의 철학 체계를 규정하는 것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적인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프리메이슨과 사탄교는 서로 등을 돌린 채, 결코 만날 수 없는 정반대의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명백히 확인하게 됩니다.


프리메이슨의 도덕적 목표는 하나의 위대한 건축적 비유, 즉 '인류라는 이름의 신전(The Temple of Humanity)'을 건설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거대한 과업은, 먼저 자기 자신이라는 거친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사회라는 건축물에 기여할 수 있는 완벽한 돌로 만들어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덕목, 즉 형제애(Brotherly Love), 구제(Relief), 그리고 진리(Truth)는, 결코 고립된 개인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회 공동체 안에서 조화와 질서를 이루기 위한, 근본적으로 사회적(Social)이고 관계 지향적(Relational)인 가치입니다. 프리메이슨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보편적인 진리 아래 모든 인류와 형제가 되어,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가 설계한 위대한 질서에 기여하는 '건설자'입니다. 그들의 길은 본질적으로 이타주의(Altruism)와 공동체주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반면에, 안톤 라베이 (Anton LaVey)의 사탄교가 제시하는 도덕적 목표는, 이 모든 것의 정반대 지점에 서 있습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외부 세계에 위대한 신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유일한 신을 위한 '자아의 제단(The Altar of Ego)'을 세우는 것입니다.


라베이가 제시한 『사탄의 성서, The Satanic Bible』의 아홉 가지 사탄 선언문은, 방종, 복수, 그리고 자기중심주의와 같은, 전통적인 사회가 억압해 온 모든 가치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찬양합니다. 그들에게 최고의 선(善)은 공동체의 조화가 아니라, 개인의 욕망 실현자기 만족의 극대화입니다. 그들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이며 자기 지향적(Self-oriented)입니다. 사탄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사회가 강요하는 위선적인 도덕률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동물적 본성을 인정하며,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지배자'입니다. 그들의 길은 본질적으로 이기주의(Egoism)와 급진적 개인주의를 향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이 두 세계관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들이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비롯됩니다. 프리메이슨은 인간을, 비록 불완전하지만 이성과 수양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회적 존재'로 바라봅니다. 반면에 라베이 사탄교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존과 번영이라는 본능에 충실한, 고독한 '육체적 존재'로 규정합니다.


프리메이슨과 사탄교의 도덕적 목표는 단순히 다른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정면으로 대치(Antithetical)됩니다. 프리메이슨의 윤리가 '어떻게 하면 나를 다듬어 우리를 건설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사탄교의 윤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억압에서 벗어나 나를 해방시킬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하나는 사회적 책임을 통한 자기 완성의 길을, 다른 하나는 사회적 책임으로부터의 탈피를 통한 자기 긍정의 길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프리메이슨을 사탄 숭배와 동일시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 묵묵히 돌을 쌓아 올리는 건축가와, 오직 자신만의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는 정복자를 같은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심각하고도 근본적인 철학적 폭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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