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마녀

파란 방갈로의 노래 15

by 블루

폴의 장례식이 있고 난 후 스몬은 혼자 살던 스테이시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고, 나도 시간이 될 때마다 그녀를 찾았다. 우리는 모여 매일매일이 비슷한 날들에 대해 지루한 얘기를 나눴고, 어쩌다 내가 모르던 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폴의 어릴 적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고, 스몬은 얼마나 그가 멋진 아이였었는지 회상을 하며 가끔 눈물을 닦아 내기도 했다. 결혼도 포기한 채 그렇게 동생인 폴을 키웠다고 한다.


그의 집안사람 대부분이 나이 50이 되기 전에 단명을 했던 이유로, 그는 어려서부터 독신을 선언했었다 한다. 그의 부모들 역시 젊은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셨고, 15살 위의 누나 손에 자랐던 그였기에, 부모 없이 살아야만 하는 슬픔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기 대에서 그 슬픈 유전자를 끝낼 것이라 말하곤 했다 한다. 그는 일찍이 그의 운명을 알고 있던 것일까?


그리고 폴의 점심인 샌드위치를 내게 양보했던 그날, 폴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게걸스럽게 저녁을 해치웠다며 스몬은 웃으며 말을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와 얘기를 했다며 폴은 들떠 있었다고 스몬은 덧 붙였다. 딱히 나누었던 대화를 한 것도 없었는데, 그는 그날을 특별하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지고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할 때는 웃었어도 가슴은 아렸다.


그즈음 피터의 농장에 대해 또 다른 소문이 마을에 돌기 시작했다. 산촌과 멀리 떨어진 어느 해안가 도시에, 무리하게 건축 사업을 시작한 피터는 불행하게도 그쪽 사업에서는 운이 없었다.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고, 무리한 은행 융자와 더디기만 했던 건설 쪽의 진행문제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다. 농장은 눈에 띄게 운영란을 맞았다. 농장에 입금되는 수표는 점점 줄어들었고, 지출되어야 하는 인보이스로 독촉 메일과 전화는 늘어만갔다.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일찌감치 말의 위탁을 철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연일 말들을 데려가려고 방문하는 웨건과 트레일러들로 농장은 붐볐다. 그리고 그 넓던 농장 부지도, 떡이 잘려 나가듯 나뉘어 팔려나갔다. 일이 터지기 얼마 전 피터의 아내인 마리와 아이들은 미국으로 이미 이주를 한 상태였고, 피터조차도 농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기 시작하였다. 결국엔 그나마 가능하던 피터와의 전화통화도 수월치가 않았다. 농장 직원들에게도 임금이 미뤄지기 시작하자, 눈치 빠른 사람들은 예고도 없이 일을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카운슬의 허가가 바로 나올 것 같던 블래싱 홀의 허가가 나지 않아, 블래싱 홀에서의 수입조차 기대할 수가 없었다. 농장은 10분의 1 정도로 작아진 농장 부지와, 사무실 몇 개와 피터네 가족들이 쓰던 주택, 마구간 두채 그리고 쓰지도 못할 블래싱 홀이 다였다.


나는 그래도 계속해서 출근을 할 수 밖엔 없었다. 말관리사와 사육사가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여전히 마구간 두 곳엔 12마리의 말들이 남아 있었기에, 말들의 식사를 챙겨주고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들 중엔 썬더와 이브가 있었고, 나머지는 피터 개인 소유의 말들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딜란이 나와 함께 농장에 남아 주었던 것이었다. 농장이 기울며 제일 먼저 농장을 떠날 것 같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그는 전과 달리 진지한 모습으로 변해있었고, 농장에 남아 말들을 돌보던 내게 오히려 고맙다며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10월의 어느 날, 끔찍한 그 산불이 시작되었다. 금방 불길이 잡힐 것 같던 그 불은 기어이 블루마운틴을 삼키고 우리 마을 가까이 타들어 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대피를 권하던 정부의 말이 무색하리만치 사람들은 쉽게 마을을 떠나지 못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었기에 우리는 쉽게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새벽 끝내 진회색의 연기는 하늘을 덮었고, 산을 태우던 재는 함박눈처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직까지 타고 있던 불꽃도 같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집주인 데비와 레오는 새벽 일찍 차 두대로 나누어 짐을 꾸렸고, 두 시간 떨어진 곳에 마련된 대피소로 떠난다며, 나와 아이들에게도 같이 가자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나는 갈 수가 없었다. 농장에 남아 있던 10여 마리의 말들 때문이었다. 불의 진로를 바꾸지 못했다는 소식을 마을사람들과 나는 전날밤에 들었다. 나는 예전 폴로경기가 열렸던 도시의 큰 농장을 떠 올렸고, 어제 늦은 밤에 그 농장주에게 전화를 걸어 말들의 구조를 부탁했었다. 그리고 그 농장주는 흔쾌히 자원봉사자들을 찾아, 오늘 새벽에 농장으로 보내겠다 약속을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급하게 아이들의 물건을 챙겨 레오와 마리의 차에 실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부탁했다. 레오와 마리는 나의 굳은 의지를 끝내는 꺽지 못했고 걱정하던 우리 아이들을 싣고 대피소로 떠났다.


나는 아이들이 떠나자 바로 농장으로 달렸다. 날리던 재로 인해 차는 연신 와이퍼를 작동해야 했으며, 뜨거운 공기를 담은 강풍으로 인해 불은 예상보다 빨리 마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농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엔 이미 소방대원과 경찰들이 길을 막아 놓고 있었다. 차를 돌려 나가라는 그들에게 나는 농장의 말들을 구해야 한다 이야기를 했고, 농장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다 설명했다. 세 명의 소방대원이 함께 농장으로 가 주었다.


고맙게도 얼마 있지 않아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진 여섯 대의 웨건을 부착한 트럭들이 도착해 주었다. 말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과 분위기로 흥분해 있었다. 웨건에 말을 싣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기 시작하였다. 나에게 이젠 농장을 떠나라며 말하던 소방대원들과 자원 봉사자들은 급한 마음에 소리만 질러 대며 말들의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정작 흥분한 말들은 버티며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뒤쪽에 서서 더는 바라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이 농장의 책임자는 나였기에..

나는 나의 마음이 결정되자, 재빠르게 남자들을 뚫고 앞으로 나가 썬더의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예전의 폴이 그랬듯 입술을 튕겨 소리를 냈다. 버티던 썬더는 나를 알아봤고, 썬더가 조금 진정이 된 것이 느껴지자 나는 썬더를 제일 먼저 웨건으로 끌었다. 그러자 영리한 썬더는 아무런 저항 없이 웨건으로 들어가 주었다. 감사했다. 그 다음으로 썬더의 옆자리로 이브에게 들어가라 명령했다. 이브는 용케도 말귀를 알아듣고 따라 주었다. 그러자 소방대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을 힘들게 하며 버티던 다른 말들도, 썬더와 이브를 따라 하나씩 웨건에 올라가 주었다. 그렇게 말들은 구조가 되었다. 말들을 실은 차량들이 농장을 떠나자, 소방대원들은 더 이상 나에게 농장에서 지체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미리 농장 부지에 맞불을 놓아준 딜란의 수고를 믿고 나도 농장을 떠나야 했다. 부디 농장이 무사하기를...


농장의 진입로를 벗어나 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불은 도로 양쪽에서도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기는 마치 오븐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소방대원들은 호스로 물을 뿜어 내며 늦은 대피를 떠나는 차량들과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양방향 일차선의 도로는 중앙선위로 하나의 길만 만들어져 대피소로 향하는 길만 열려 있었다. 소방대원들이 나누워준 물에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불을 피해 도로 중간에서 걷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끝까지 자신들의 집을 지키려고 버티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순서대로 눈에 보이는 차량에 올라타고 있었다. 차량의 행렬은 차량을 얻어 타려는 사람들로 인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저 멀리 산 위에서 뛰던 불을 보았다. 하늘은 이미 까만 연기로 보이지 않았고, 불은 마치 붉은 치마를 걷고 산에서 산으로 미쳐 날뛰는 마녀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마녀가 뛰고 있던 그곳은 바로 방갈로가 있는 곳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어젯밤 통화로 스몬은 스테이시와 미리 대피소에 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안심은 되었지만, 지금 방갈로가 타고 있는 걸 보며, 나는 그 곳 나무 밑에 잠든 폴이 걱정되었다. 부디 뜨겁지 않기를...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 있어주기를...

나는 트럭의 타이어가 녹아 도로에 늘어 붙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의 차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소방대원 한 사람이 달려!!라는 고함과 함께 나의 차 뒤 범퍼를 힘껏 내려쳤다. 나는 방갈로 쪽에서 시선을 거두고 앞을 보고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걱정하고 있을 아이들과 사람들에게로.. 그러나 붉은 마녀는 여전히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2013년 여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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