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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여인> 감정의 파고를 달래주는 '시간'

알퐁스 도데의 <아를의 여인>을 읽고

by 김태경

짝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거다.

아무도 모르지만 내 속은 타올랐다가 꺼지고 하와이를 갔다가 순식간에 캄캄한 동굴을 가기도 한다. 세상 가장 슬픈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어 드라마 속에서나 일어나는 우연한 만남이 내게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내가 20대 초반에 잠시 그랬던 적이 있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대는 짝사랑의 부작용으로 마음이 많이 복잡했었다. 그래서 그때..

'에잇.. 다 때려치우고 수녀원이나 들어갈까 보다. 수녀복을 입으면 이 감정의 소용돌이가 나를 피해 가지 않을까?'

사람관계가 주는 애매하고 모호한 감정들이 매우 소모적이라고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한 번은 그냥 중매로 선 딱 보고 결혼합시다 하며 서로 악수하고 결혼하고 잘 살기로 노력하는 게 훨씬 더 건강한 제도라고 여겨지기도 했었다.


이제 40살이 훌쩍 넘어 그 시절을 잠시 회상해 보니.. 어른들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고 나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금이야 죽고 못 살지, 나중에는 못 죽여서 안달일 텐데.."


사람이 노화되어 갈수록 뭔가 달라지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나쁜 방향으로 달라지는 사람도 많지만 그게 기본 원칙은 아닌 것 같다.

젊은 시절 뜨거운 사랑이 인생 전부인 줄 알았지만 시간이 흘러 겪게 되는 많은 생의 풍파들은 두 남녀를 사랑보다 높은 수준인 우정과 의리의 단계로 데려가 서로를 가엾게 여기며 토닥토닥 거리는 둘도 없는 친구로 만들어준다.

나 예쁘게 입고 꾸미는 것이 중요해 시린 겨울에도 짧은 치마 입고 다녔던 체력은 배터리가 점차 소모되며 늦가을부터 내복을 찾는 처지가 된다. 지금부터 하는 운동은 미모가 아니라 수명 연장을 위한 것이다.

내 공부, 내 취미를 위해 계산하며 저금했던 돈들은 이제 내 자식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굿즈를 사거나 학원비로 지출한다. 자식이 주는 행복과 기쁨이 너무 커서 내가 지불해야 할 대가에는 계산기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인생의 풍파, 시간의 흐름을 거친다고 동전 넣으면 나오는 뽑기처럼 '성숙한 인격'이 뿅 하고 나오는 것은 아니리라.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반성하고, 선택을 고민하고 점차 주어지는 책임을 받아들여 내가 알지 못하는 더 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 사람들의 선택들이 모여 순리가 만들어지며 그 결과는 대부분 좋고 옳은 것으로 귀결되는 편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지혜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아를의 여인> 속 '장'의 마지막 선택이 가슴 아플 따름이다.

남프랑스 아를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장은 스무 살의 농부로 어느 날 투기장에서 단 한 번 만났던 '아를 여자'에게 첫눈에 반한다. 장은 그녀를 얻지 못하면 죽어 버리겠다고 선언하고 가족들은 그녀가 없는 만찬자리지만 장과 그녀의 결혼을 허락한다. 하지만 그때 한 청년이 그의 집에 찾아가 장의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영감님, 아드님이 결혼하려고 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입니다. 이년 동안 저와 부부처럼 지냈죠. 제 말이 거짓말 같거든 이 편지를 보십시오. 그 여자의 부모도 모든 것을 알고, 제게 딸을 주기로 약속했죠. 그런데 영감님의 아드님이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니까 그 뒤로는 그 여자나 그녀의 부모도 저를 본 척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저와 함께 살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장의 아버지는 장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고, 그 뒤로 장은 아를의 여인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을 끊어낼 수는 없었다. 장은 걱정하는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활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였지만 모두가 자러 간 어느 날 밤, 장은 밤새도록 흐느껴 울다가 다락으로 올라가 몸을 던지고 말았다.


'난 그녀를 너무도 사랑한다..... 그냥 죽어 버려야겠다....'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장의 사랑을 응원해 줄 수가 없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벗어나지기도 하는 일이다.

오히려 그 소용돌이에서 나와야 자신의 실체를, 감정의 진짜 모습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아! 우리 마음은 왜 이렇게 나약한지! 사랑이란 얼마나 지독한지! 경멸조차 사랑을 죽일 수 없으니.."


시간이 흐른다고 나약한 마음이 강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나약함 위에 군살이 생기고 맷집이 생기는 것일 뿐.

그래서 나는 수녀원에 들어가고 싶었을 정도로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내게 가져다주었던 옛 시절의 '짝사랑의 경험'을 추억으로 꺼내 보며 짝사랑의 고달픈 누군가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더욱 건강하게,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사랑을 남은 인생에서 나가기로 마음먹게 되기도 했다.


인생의 모든 경험은 '시간' 덕분에 약이 될 수 있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겨내고 시간을 견디어 나가느냐의 문제일 뿐..

좀 덜 힘들게 겪으라고 인생에 가족, 친구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것 아닐까.


안다. 이 말이 꼰대같이 들린다는 것을.

할머니들이나 하는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이 골 아프고 예측불가능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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