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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서리꾼> 아이들 놀이에 필요한 어른들의 불문율

이청준의 <이야기 서리꾼>을 읽고

by 김태경

동네 놀이터엔 생각보다 아이들이 없다.

어린이집 다니는 어린 아이들만 조금 있고 초등학생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느 날 초등학생들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면 아마 미끄럼틀 위에 오순도순 모여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함께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긴 10살 내 아들도 놀이터는 잘 안 간다. 학교 끝나고 검도 학원 갔다가 집에 오면 TV 만화 보거나 엄마에게 빌린 휴대폰으로 게임 잠깐 하는 게 일과다.

일하는 엄마들이 많아 평일에 아이들끼리 만나서 노는 일도 거의 없고 잘 만나지도 못했다.

엄마들도 바쁘고 아이들도 바쁘다.


나는 초등학생 때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땅따먹기를 하고 놀았다. 학교 쉬는 시간에는 말뚝박기를 했다.

특히 고무줄놀이를 할 때 어떤 친구는 허리만큼 높이에서 콩콩콩 뛰며 잘해서 엄청 부러웠었다.

고무줄을 걸고 뛰면서 불렀던 노래는 이거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소나무의 푸른 기세 적군을 무찌르고서 일 년 삼백 육심 오일 사라진 내 전우여 안녕'


말뚝박기는 또 어떤가! 남아 여아 가릴 것 없이 편 먹어서 했는데 올라타는 놈은 꼬리뼈로 받치고 있는 놈의 등을 냅다 찍기 위해 혼신을 다했고, 머리와 머리가 겹쳐진 곳을 무너뜨리기 위해 저어~멀리에서 힘차게 달려와 엉덩이 일격을 가했었다.

왜 그렇게 재미있게 버티고 왜 그렇게 신나게 달려왔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이런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마 할 수도 없을 거다.

고무줄놀이는 여자 아이들에게 일종의 뽐내는 놀이였는데 이게 아니어도 요새는 뽐낼 놀이가 수두룩하고,

저런 어마무시한 가사의 노래를 아이들이 부르는 것도 지금 생각하니 좀 이상한 것 같다.

말뚝박기는 말해서 뭘 하나. 남아 여아가 섞여서 저 놀이를 한다는 것 자체가 TV 뉴스에 나올 수도 있다.

말뚝박기 놀이의 재미는 잊혀진 채 폭력적이다 위협적이다 등등 학부모 민원이 쏟아질 수도 있다.


이청준 선생님의 단편소설 <이야기 서리꾼>은 3대가 사는 집에서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어릴 적 참외서리, 수박서리 했던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이다. 과일을 넘어 돼지 새끼 원정 서리 이야기까지 확대되어 흥미진진한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읽게 된다.


소설 속에서 할아버지는 거실에 앉아 늘 이 말을 시작으로 존재감을 나타내셨다.

"요즈음 세상은 통 재미가 없어요. (중략) 그저 밥 먹고 앉으면 눈이 빠지게 텔레비전이나 보려 하고...

하기야 요즘 젊은것들은 겁이 너무 많아 밤 서리 같은 건 아예 엄두를 못 낼 테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래서 소설 속 할아버지의 말을 읽고 내 어릴 적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술래잡기 말뚝박기했던 추억을 떠 올렸고, 동시에 거실에 앉아 넷플릭스 만화를 보고 있는 내 아이를 바라보았더랬다.


할아버지의 어릴 적 참외, 수박 서리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 중 인상적인 부분을 소개한다.


".. 동네 어른들은 들밭 서리질이라도 참외를 몰래 따 가는 정도는 이웃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질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가 주었지만, 수박 서리부터는 도둑질로 취급했어. 가축을 잡아갈 때도 닭이나 오리 같은 두 발 달린 가금 종류는 나중에 들통이 나더라도 값을 물어주면 용서하고 넘어갔지만, 토끼나 돼지 같은 네 발 가축의 경우엔 값을 호되게 물어주는 것은 물론 도둑질 죗값으로 파출소로 끌려가 징역을 살아야 하는 일도 있었단다.."


".. 서리꾼들에게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야 한다.... 밭주인이 뒤를 쫓지 않는 한 서리꾼들은 절대로 밭 가운데선 쓸데없이 남은 참외나 넝쿨을 상하지 않게 가만가만 발길을 조심해야 했어."


"서리를 한 참외는 모두 그 밭가에서 먹고 오는 것, 그것을 남겨 집으로 가져가지 않는 것이 큰 규칙이었지.

사내대장부의 담력을 키우는 길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쓸데없이 욕심을 내어 남의 밭 참외를 많이 따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지. 서리한 참외를 집에까지 가져가면 그건 도둑질이 되는 거였으니까."


소설을 읽고 보니 그 옛날 서리에는 참 많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

서리꾼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線)과 서리를 당한 밭주인의 마음씨에 대해 나름의 불문율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돼지새끼 서리를 하다가 들통나지만 동네 어른들은 당장 그 아이들을 도둑을 몰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다음날 어른들이 모여 아이들에게 잘못을 일러주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수 있는지 몇 가지 옵션을 아이들에게 제시한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서리꾼에서 서리꾼지킴이가 되었다.


아이들은, 아이들을 향한 어느 정도의 이해와 가르침이 담긴 어른들의 큰 그림 속을 신나게 활보하면서 자신들이 지켜야 할 선(線)을 배워 나간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무작정 오냐오냐 하지도 않고 무작정 하지 말라고도 하지도 않으며, 때론 이해해 주고 눈감아 주며 잘못의 강도에 따라 따끔하게 질책하며 아이들에게 책임지는 방법을 일러준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어렸던 그 시절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생각했지 싶다.

'아이들이 뭘 알겠어? 넘어지고 이마 깨져 보고 하면서 크는 거지'

'잘못하면 혼쭐이 나야지 안 그러면 커서 소도둑 된다니까'

'이렇게 살살살 혼낼 게 아니고 다신 이런 짓 못하게 어른들이 다 같이 모여서 따끔하게 제대로 일러줍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제 할아버지의 옛날 옛적 이야기처럼 된 듯하다.

밖에서 노는 건 위험하고(악한 세상),

남의 집 아이는 함부로 야단 치면 안되고(그 집 부모가 싫어할 수도 있어),

누군가의 집이 아니라 키즈카페에서 날 잡고 만나서 놀고(내 공간을 굳이 오픈할 필요는..),

아이들은 휴대폰과 컴퓨터로 놀이를 하고(시대가 그런 시대야, 뒤처지면 안 되잖아)...


나쁘다는 게 아니라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말이다.

나도 아이들을 밖에서 놀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집에 다른 집 엄마들을 초대한 적도 없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이 모여 함께 몸으로 놀이를 한다는 것은

많은 전제조건 즉, 아이들을 향한 어른들의 불문율이 작동되어야 하는 것 같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맞네


예전처럼은 다시 돌아갈 수 없겠지?

뭔가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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