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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인간답게 하는 것은.. <옥상의 민들레꽃>

박완서 님의 <옥상의 민들레꽃>을 읽고

by 김태경

TV에서 본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사고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데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도와주기는커녕 영상을 찍고 이를 유튜브에 올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실 역시 그가 그 영상을 올렸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것이지만 조회수를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돕기를 거부하고 영상을 찍고만 있었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는 안식일에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질병을 앓아 온 사람의 병을 고쳐주지만, 이를 지켜보던 한 무리의 사람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하면 안 되는 일 중의 하나라며 예수를 비난한다.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안식만 해야 한다는 전통 관습을 어겼다는 이유였다. 불치병(病)이 고쳐지는 것을 목격했다면 반갑고 기쁘게 여기며 당장 내 가족, 친구 중 아픈 사람을 데려와 낫게 해 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박완서 님의 단편소설 <옥상의 민들레꽃>은 광장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하는 광장 아파트에서 최근 노인 2명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파트 옥상과 베란다에서의 추락사였다.

사건 발생 후, 아파트 주민들은 사고 수습 대책 회의를 열었다. 돌아가신 분들과 가족을 위한 대책회의가 아니라 아파트 값을 똥값으로 만들지 않게 위한 대책 마련 회의였다.


".. 다시는 그런 사고가 다시는 안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이 소문이 퍼져 보십시오.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건 우리 아파트 값일 겁니다. 아마 한 번만 더 사고가 나면 우리 아파트 값은 당장 똥값이 될 걸요."


주민들 기탄없이 낸 대책들은 이러했다.

"절대로 이번 사고를 입 밖에 내지 않아야 합니다. 소문만 안 나면 그런 일은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베란다에다 쇠창살을 달면 어떨까요? 사람의 몸이 빠져나갈 수 없는 쇠창살 말입니다"

"베란다 쪽으로 난 유리창에 새로운 자물쇠를 달면요?"

소문을 막는 건 해야 하겠지만 대책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베란다에 쇠창살과 자물쇠를 달게 되면 겉모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아파트가 감옥처럼 보여 아파트 값이 똥값이 될 것 같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차분한 말투에 노교수의 등장으로 근본대책이 세워지나 싶었지만 노교수는 더 황당하고 무례한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두 노인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부족하게 해 드린 것이 아닌지를 묻는 것이었다. 두 노인의 자녀들은 부족함 없이 풍족한 환경에서 돌아가셨지만 한 가지 불만이 있으셨다고 했다.

시골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손자를 업어서 기르고 싶어 하셨고, 바느질을 하고 싶어 하셨고, 흙에다 뭘 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고 싶어 하셨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말을 들은 주민들은 돈 가지고 안 되는 일이 아직도 남아있다며 통탄했다.


몇 장 되지 않는 이 짧은 소설 결말엔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엄마를 따라 대책 수습회의에 참석한 어린 소녀는 아파트 값 하락 문제와 향후 발생가능한 자살 방지 대책을 알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이런 중대한 모임에 어린아이를 데려온 엄마에게 퇴장을 명령해 버리고 만다.

이 반전결말은 너무 가슴 아프기도 하고 동시에 설레는 이야기이기도 해서 여기에 기록하지는 않으려고 한다.(박완서 님의 이야기를 축약해서 적기엔 내 실력이 부끄럽다)


궁전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이 가짜일 거라고 의심받을까 걱정했다.

궁전 아파트 사람들이 이제껏 행복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알아줬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궁전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비싸고 화려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우월감으로 가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생명의 소멸, 그것도 스스로의 생을 꺼뜨릴 수밖에 없었던 슬픈 죽음 앞에서 아파트 값이 똥값이 되어 자신들의 우월감이 상실될까, 가진 돈이 줄어들까 하는 염려에 매여 스스로 비인간적인 집단임을 보여주었다.


궁전아파트에 살지만 그곳에 살던 어떤 인생은 살고 싶지 않은 인생이었고

다른 이들이 궁전으로 보는지 아닌지에 따라 나의 행복이 결정되는 가짜 삶이었다.

누군가의 값매김과 무성한 소문에 따라 삶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을 맡기는 것만큼 불행한 짓이 또 있을까.


실제 광장 아파트에 살지는 않지만 사회관계 속을 살아가는 이상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평생 겪어야 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에 향해 튼튼한 밑받침 혹은 뿌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두 분의 노인에게 흙을 밟고 손주를 업어 키우고 바느질을 하는 것이 숨통 트이는 일이었다면 모든 사람에게도 숨통 트일만한 일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다.

현재의 어려운 상황이 당장 해결될 것 같지 않다면 버텨 나가야 하는 건데,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나를 쉬게 하고 멀리, 높게 보며 내 속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보게 해 주는 '숨통 트임 거리' 말이다.


하다못해 길가 틈새에 피어난 민들레 꽃을 보는 일이나, 조용한 숲 속을 걸으며 나무 냄새를 맡는 일이 트임 거리가 될 수 있겠다. 글을 쓴다거나 식물을 키우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고 커피를 갈아 내리는 것 뭐든 나를 위한 숨통 트임 거리를 찾아서 조금씩 하다 보면,

아파트 값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사연에 한번 귀 기울이게 되고

내 숨통 트임 거리를 소개하며 괴롭고 힘든 누군가의 말동무가 되어 줄 수도 있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까?

우연한 말동무가 인생을 살릴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어쩌면 아파트 값 폭등보다 말 한마디 눈 빛 한 번으로 누군가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게 더 쉬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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