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성숙한 삶을 위하여
안식년(安息年, sabbath year) 제도라는 것이 있다.
구약성서에서 유래된 안식년은 농경사회에서 7년마다 농사를 짓지 않고 땅을 쉬게 하는 것이다. 안식년이 되면 그 해에는 의도적으로 밭을 경작하거나 과수원의 나무 가지치기 하는 행위들이 모두 금지되었다. 다만 저절로 자란 것을 수확하는 것까지는 금지하지 않았는데 가난한 사람들과 가축을 위한 배려였다고 한다.
안식년은 그저 쉬는 것에 그 의미가 있지 않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의식주의 공급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한 해 동안 생계유지 목적으로 경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줄 거라는 신앙 고백의 의미를 지닌다.
종교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안식년 혹은 안식월 제도는 기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직원 복지 제도로 활용되고 있다. 유수 대기업들은 특정 직급 이상 승진 혹은 근속 년수 주기에 따라 직원에게 안식월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유급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근속연수에 따라 최장 2주까지 휴가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연차와 붙이면 3주 이상 쉴 수 있으나 사실 연차까지 연동해서 쉬는 것은 약간 어렵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일하고 토요일, 일요일 쉬는데 추가로 안식을 위한 별도의 기간이 필요한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근데 내가 아이들 다 크고 뒤늦게 육아휴직을 하며 집에 있어 보니 이 안식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참고로 나는 육아휴직 급여 수령자이다)
일단 나에 대한 시간을 가지게 되어서 좋다.
회사 다닐 때는 아침 일어나면 애들 등교와 내 출근 준비로 바쁘고, 저녁에는 또 아이들 공부 봐주고 이것저것 챙기느라 바쁘고, 집에서 야근을 했던 적도 많다. 꼭 일을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일 생각에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휴직을 하니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그 시간 동안 내가 이 시간들을 어떻게 채워 나갈지 차분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자연스럽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해 주었다.
'내가 나중에 하겠다고 미뤄 왔던 일은 뭐가 있지? 내가 하고 싶은 건 뭐지? 어떻게 시간을 쓰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아침에 아이들 학교 가고 나면 혼자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쓴다. 날 더우니 선풍기 약하게 틀어 놓고 아이스커피 한잔 탄 후에 93.9 라디오 선곡음악을 들으며 어제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오늘 할 일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생각한다. 재촉하는 것도, 강요하는 것도, 성과를 달성해야 하는 것도, 제출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 투두리스트를 쓰며 오늘 하루 어떻게 살지를 계획한다. 그 계획은 나름 체계적이고 치밀하다.
다른 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남편, 아이들, 부모님, 친구들.. 시간적 여유는 이 사람들의 사정을 앞뒤로 좀 더 제단 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허락한다. 그래서 이 친구는 만나서 사는 얘기 나누어 보고, 가족과는 저녁 한 끼 식탁에서 함께 하기로 마음먹고, 부모님과도 뭘 함께 할지 구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까지 생각이 나아가게 되는 것 같다.
이 회사에 복직하는 게 맞을지부터, 복직이 맞다고 하면 내가 뭘 더 보완하면 좋을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지 성격을 다듬어야 하는 것인지 등등 이렇게 저렇게 내 마음대로 생각을 막 해 본다.
나도 이런 시간을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일을 시작한 지 거의 20년이 되어서야 가져본다.
상황 상 안식주간, 안식월, 안식년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면,
자기 자신에게 하루라도, 반나절이라도 쉴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당면한 복잡한 일로부터 잠시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시선을 돌려보고, 내가 흘러온 삶의 관찰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마음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땅에게 쉴 시간을 주라고 했나 싶다.
땅에게도 허락된 안식이 신이 귀하게 만들고 사랑한다는 사람에게도 당연히 주어져야 할 일이다.
다만 안식의 시간은 자기 연민이나 위로에 빠지는 시간이 아니고 도파민을 끌어올려 스트레스를 확 푸는 감정소요를 위한 것도 아니며 육아와 집안일로 몸이 삭아져 가는 시간도 아니어야 한다.
안식이 주는 자유와 여유에서 나오는 생각과 마음의 정리, 정돈이 나를 좀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길 바란다.
후에 회사에 복직하면 화를 좀 더 덜 내며 관대한 사람이 된다거나,
복잡하고 어려운 큰 일을 맡았을 때도 좀 더 의연하게 일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잘 절제하는 사람이 된다거나...
될 수 있을까??
사실 그때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시간들이 훗날 귀하게 쓰이는 나의 자원이 되었으면 한다.
나중에 한번 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