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이파이브>를 보고
부부교육 명사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좋은 말들이 많았지만 정확히 기억이 남는 말은 이거다.
"남편이 계속 로션 뚜껑을 안 닫는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냥 아내가 닫아줘요.
남편도 아내에게 말 못 하고 몰래몰래 해 주는 것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걸로 싸우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 그냥 해 주면서 살면 됩니다. 너무 다 바꾸려고 하지 마요. 그래서 싸움 나는 거예요"
우리 집도 그렇다.
세심하게 가족들과 주변 사람 챙기는 건 내가 맡아서 하고, 전세계약하고 자동차 정비하고 돈 셈하는 건 모조리 남편이 한다. 주말 주요 일정은 내가 짜고 외식 장소는 남편이 정한다.
나는 내가 잘하는 걸 하고, 남편은 남편이 잘하는 걸 하면 된다. 부부가 둘 다 100% 다 잘할 거면 뭣하러 둘이 사나.. 혼자 살면 되지. 내 부족한 건 남편이 채워주고, 남편이 또 잘 못하는 건 내가 하면 되는 일이다.
회사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갓 입사한 신입직원이 할 일이 있고, 5년 넘은 대리나 과장이 해내야 할 일이 있고, 직책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해내야 할 일이 있다. 모든 직원이 모든 것을 잘하는 회사는 없다. (물론 보통 회사는 전 직원의 완벽한 제너럴리스트화를 지향하지만 직원 입장에서는 한 분야에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것조차도 쉽지 않으므로..)
친구 관계도 그렇지 않나.
함께 어울리는 친구 무리 속에는 여러 부류의 인간 성질들이 존재한다. 함께 한 세월과 '우정'이라는 놀라운 힘은 각 성질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만들어 내준다. 무리 중 유난히 예민하고 까칠한 인간이 있으면 그 친구와 매번 신경전 하는 친구가 있고 또 그 옆에는 그렇구나 왜 저런다니 하며 뭐든 받아주는 친구도 있고, 또 그 옆에는 곧이곧대로 지적질하고 훈수 두는 친구가 있고 또 그 옆에는 아무 신경 안 쓰고 다독이며 해결하는 친구가 있다. 그러니 성향, 성질, 모양, 사연, 표현 방식 다 다른 인간들이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고 동료가 되는 것이야 말로 인생사 가장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하이파이브>는 어느 날 장기 이식을 받은 6명이 각기 다른 초능력을 갖게 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간을 이식받은 사람은 손만 대면 질병을 치료하고, 각막을 이식받은 사람은 와이파이와 같은 전기를 볼 수 있어 모든 전자제품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심장을 이식받은 이는 강한 힘과 빠른 발로 종횡무진하며, 폐를 이식받은 사람은 입김 하나로 건물을 부술 수 있는 엄청난 폐활량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욕심이 난 거다. 마치 놀부, 혹부리 영감처럼 다른 이들이 초능력을 모두 자기가 가짐으로써 일종의 전무후무한 초능력 스페셜리스트가 되어 이 시대 '신(GOD)'이 되겠다며 빌런으로 등극한다.
각기 다른 장기를 이식받고, 또 각자 다른 사람을 살았던 사람들은 히어로가 되기 위해 똘똘 뭉쳐 사람을 구하기도 하고 빌런을 무찌르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능력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모두의 능력을 합하여 악당을 물리쳐낸다는 그런 이야기의 영화다.
기존 히어로물과 별 다를 게 없는 소재이지만, 약간의 B급 느낌 물씬 풍기며 어설프고 찌질한 인물들에게 초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기존 할리우드의 마블 혹은 X맨 시리즈와는 명백히 다른 이야기를 선사하는 영화이다. 이것도 나름 K-히어로물이랄까? (나는 '소림축구'를 보는 듯한 감성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유독, 서로의 초능력에 욕심부리지 않고 힘을 합하는 개별 초능력자(?)들이 신선하게 다가온 영화였다. 초능력을 가진 6명 중에 혼자 다 갖겠다고 설치는 욕심쟁이가 1명뿐이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나도 초능력을 갖고 싶다.
투명인간 망토가 있어 유명하고 저명한 사람들 옆에 가서 무슨 이야기 하나 들어보고 싶고
도깨비 공유처럼 문만 열면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 도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이 폭염을 피하고 싶고
타임슬립 능력이 있어 과거로 가서 강남에 빌딩을 사거나 복권 당첨 번호를 알아오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초능력은 현실에 없다. 초능력 대신 오래되고 반복된 경험이 준 습관들을 기반으로 각자 일상의 제너럴리스트로 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가진 초능력을 찾아봐 볼까?
-나는 아이들이 빽빽이 많은 운동장에서 한 번의 스캔으로 내 아들을 찾아낼 수 있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20분 만에 저녁식사를 차릴 수도 있다.
-내 아이들, 내 남편 얼굴을 쓱 보면 그들의 현재 근심 유무와 감정을 대략 읽어낼 수도 있다.
-길을 가다 '저 인간은 피해야 할 상대이군'을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으며
-적게 먹어도 현재의 몸무게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남다른 능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사실 더 찾을라치면 이것 말고도 더 많을 텐데 어쩌면 나쁘게 쓸 수 있는 초능력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분량대로 욕심부리지 말고 삶을 살아가자.
내 것이 아닌 다른 이의 능력을 뺏으려 탐하지 말고, 내가 가진 초능력을 찾아 십분 발휘하여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쓰는 인생으로 만족하며 말이다.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다른 이들과 똑같은 초능력이라고 해도 내가 안 하면 없어질 능력 아닌가.
할 수 있다면 좀 더 너그럽고 감사한 마음을 지닌 초능력자가 되어 내 주변 사람들의 그저 그런 일상적 능력을 재능으로, 노력으로 바라봐 주고 알아채 주는 능력을 발휘해 보는 건 어떨까.
감당하지도 못할 더 큰 무언가를 바라기 전에, 내 분량을 찾아 갈고닦으며 살아가다 보면 또 다른 분량의 초능력을 가진이와 함께 더 놀라운 능력을 펼치는 인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갓난아이가 팔다리가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과정이야말로 초능력인 것이고,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어 자녀를 낳아 길러가는 과정 역시 각자 가진 초능력을 합하여 살아가고 있는 하이투(HI TWO)의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맛난 장조림으로 가족들의 입맛을 돋우는 초능력을 발휘해 봐야겠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를 보면 마음 편해질 수 있도록 환하게 웃고 안아주는 초능력도 발동시켜 볼 생각이다.
그대들은 오늘 어떤 초능력을 발휘하실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