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식탁속으로

by Yan

햇살 가득한 아침, 방콕의 거리에서는 볶는 냄새가 퍼진다. 노점상 아주머니가 쌀국수를 빠르게 팬에 볶는다. "팟타이 하나!" — 새우가 통통 튀고, 땅콩 가루가 사르르 뿌려진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 하나. 이 '국민 음식'은 전통 음식이 아니다.
1930년대, 당시 태국 수상이었던 피분 송크람은 국민정신을 일으키기 위해 새로운 음식을 만들자는 캠페인을 벌인다. 그리하여 ‘태국인이라면 팟타이를 먹자!’는 구호와 함께 팟타이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외래 문물을 경계하며 만들어낸 일종의 ‘국가 브랜드’였던 것이다.


그보다 북쪽, 안개 낀 하노이의 새벽. 거리 곳곳에 퍼지는 국물 냄새. "퍼(Pho) 드세요~"
노점 의자에 앉은 한 노인은 말한다.

"우린 이 소고기 국수를 프랑스한테 배운 거요."

베트남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돼지고기와 허브를 먹었다. 그런데 소고기? 그건 프랑스 식민 지배의 결과였다. 프랑스는 소고기를 소비하고 남은 부위를 식민지 사람들에게 팔았다. 베트남인들은 그 남은 고기와 뼈로 깊은 국물을 우려냈고, 자신들만의 향신료와 허브를 더했다.
그렇게 퍼는 외세의 흔적과 자존심이 섞인 한 그릇이 되었다.


서쪽으로 건너가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한 골목에서 밤늦게까지 지글지글 볶는 냄새가 끊이지 않는다. 미고랭!
그런데 이 볶음면은 어디서 왔을까? 실은 이민 온 중국인들이 만든 음식에서 유래되었다. 볶음국수인 차우멘이 인도네시아식으로 변형된 것이 바로 미고랭이다.
하지만 진짜 재미는 여기 있다.
인도네시아엔 ‘인스턴트 미고랭’이 세계적으로 팔린다.
'인도미 미고랭'이라는 브랜드는 지금도 세계 90개국에서 팔리며, 수많은 유튜버들이 '미고랭 먹방'을 찍을 정도.
심지어 2019년엔 CNN이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인스턴트 라면 1위로 선정했다.
그야말로 면 한 가닥이 국경을 넘어 글로벌로 간 셈이다.


동남아 남단, 말레이시아의 아침. 나시르막이라는 코코넛 밥이 식탁 위에 오른다.
밥 한 그릇에 멸치, 계란, 삼발(매운 고추소스), 땅콩, 오이까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이 나시르막은 말레이시아의 정체성이다.
얼마 전엔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 급식에서 ‘건강에 해롭다’며 나시르막을 빼겠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국민들이 분노했다.
결국 정부는 철회했고, 나시르막은 “건강한 버전”으로 다시 식탁에 올랐다.
국민들이 지켜낸 음식, 음식이 곧 문화라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태풍이 자주 몰아치는 섬나라 필리핀. 그곳의 대표 요리는 아도보(Adobo).
돼지고기 또는 닭고기를 식초와 간장, 마늘로 조려낸 음식인데, 아주 예전부터 필리핀 사람들이 만들어 먹던 방식이다.
그런데 이 음식의 이름은 스페인어다. 왜냐고?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 요리를 보고 자신들이 아는 ‘아도바르’(절이는 요리)와 비슷하다며 그 이름을 붙인 것.
그렇게 ‘이름은 스페인 것, 내용은 필리핀 것’이라는 독특한 음식이 만들어진 셈이다.


미얀마에서는 몽힌가라는 생선 쌀국수를 아침마다 먹는다.
이 국수를 얼마나 사랑하냐면, “몽힌가 없는 아침은 하루를 버린 것”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생선을 국물로 쓰고, 향신료와 허브를 더한 몽힌가는 단순한 음식 같지만, 미얀마 사람들의 삶의 리듬 그 자체다.


한편 캄보디아에서는 생선을 바나나잎에 싸서 찌는 아목 트레이가 있다.
태국에도 비슷한 요리가 있는데, 이 두 나라는 고대부터 서로 전쟁과 문화 교류를 반복한 역사적 이웃이다.
그래서 이 커리 찜 요리는 ‘누가 먼저냐’로 은근한 신경전이 있다.
하지만 둘 다 공통적으로 코코넛 밀크와 허브, 커리 페이스트를 쓰며,
이 방식은 라오스,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까지 전역에 걸쳐 퍼져있다.
한 뿌리에서 다양한 꽃이 핀 셈이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도시, 싱가포르.
그곳의 대표 요리 “락사(Laksa)”는 마치 동남아 요리의 하모니 같다.
쌀국수, 코코넛 밀크, 새우, 커리, 고수… 한 그릇에 다 들어 있다.
그야말로 말레이 + 중국 + 인도 + 유럽이 섞인 도시답게,
한 그릇이 세계음식의 만남인 셈이다.


동남아시아의 음식들은 그저 맛있는 음식을 넘어
전쟁, 이주, 식민, 그리고 독립의 서사를 담고 있어요.
쌀 한 톨, 허브 한 줄기, 국물 한 숟갈까지도
그 민족의 경험과 지혜, 저항과 자존이 녹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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