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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편지

by 박계장

국민학교 6학년, 나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반면, 그 아이는 달랐다. 또래보다 키가 컸고, 말수가 많지 않았으나 언제나 단정한 모습으로 교실의 중심이 되었다.


열두 가지 색의 모나미 볼펜으로 노트를 정리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글씨는 반듯했고, 판서를 옮겨 적을 때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학급회의가 열리면 서기를 자청해 칠판 앞에 섰고, 선생님은 종종 그 아이의 글씨를 칭찬했다.


그 여름, 나는 그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외가가 있는 강서구 대저동에서의 방학 이야기를 담았다. 인사를 건네면 웃으며 가볍게 “안녕”이라고 답해주던 정도의 사이였으니, 답장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다만 한 번쯤, 내 마음을 전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우리 동네는 30여 가구가 한 번지를 나눠 쓰는 골목에 있었다. 주소 만으로 우편물을 각 가정에 배달할 수 없으니, 누군가 동네 입구 어느집 처마 밑에 플라스틱 바구니를 걸어두었고, 그 뒤로 우편배달부는 그곳에 우편물을 놓고 갔다.


나는 방학 내내 그 바구니 앞을 서성였다.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자전거를 탄 우편배달부가 보이면 가슴이 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의 이름이 적힌 봉투가 보였다. 두 손으로 꼭 쥐고 집까지 달려왔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자, 갈색 볼펜으로 빼곡히 단정히도 적은 두 장의 답장이었다.


“나의 여름방학은 별로 즐겁지 않았는데, 너는 잘 지낸다니 부럽다. 건강한 모습으로 개학식 날 보자.”


사촌 언니가 서울에서 왔다는 이야기, 피아노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 편지를 읽는 동안 우리 사이가 꽤나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 유년 시절, 가장 설레던 순간이었다.


개학을 맞았다. 하지만 개학 후에도 나는 쉽게 그 아이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부반장인데다 키도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크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그 아이. 답장을 보낸 것도 특별한 감정보다는 원래 그런 다정하고 배려심이 깊은 성격 탓이었 것이다. 그래도 개학 첫날, “방학 잘 보냈어?”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준 순간은 오래도록 남았다.


6학년이 끝난 뒤, 나는 남자중학교로, 그 아이는 여자중학교로 진학했다. 학기 초 버스 정류장에서 단발머리를 한 채 서 있던 모습을 멀리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무심한 삼십여년의 세월이 흐런 십여 년 전 어느 날, 국민학교 동창회 밴드 앱이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름을 하나하나 넘겨보았지만, 그 아이의 이름은 없었다. 다만, 누군가 올린 옛날 사진 속에 간신히 그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한참 뒤, 드디어 그 아이가 밴드에 들어왔다. 반가움의 댓글이 폭주했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인사가 이어졌다. 새삼 알게 되었다. 나만 그 아이를 특별하게 여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두의 기억 속에서 그 아이는 빛나는 소녀였다는 것을.


그러나 세월은 누구도 비껴가지 않았다. 그 아이의 프로필 사진은 여러 명이 드레스를 입고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어디 합창대회에라도 나가는 모양이었다. 캐나다에서 산다던가. 가끔 귀국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최근 귀국 때엔 몇몇 친구들이 용호동 어딘가에서 만났다고 했다. 사진 속 그 아이는 검정색 펌 머리에 중년의 풍성함이 묻어 있었다. 눈앞의 모습과 머릿속에 남아 있던 그 아이의 모습 사이의 간극이 순간 낯설게 다가왔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그 아이의 다정한 마음씨를 기억한다. 눈에 띄지 않는 아이에게도 따뜻했던 아이. 그 마음은 시간 속에서도 바래지 않았으리라.

그 아이가 있어서 내 유년이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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