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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걸어야 할 길

by 박계장

그는 걷는 사람이었다. 시청에서 일하던 시절, 경성대에서 연산동까지 걸어서 출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하철을 타도 4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지만, 그는 일부러 걸었다. 출근보다 출근길이 더 중요했던 사람이라 그 길에서 하루를 준비하고 정리했다.


아침 여섯 시 반 전에는 집을 나섰을 것이다. 시청에 여덟 시가 못돼 도착하곤 했으니.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유튜브 시사방송을 켰을 것이다. 음악보다는 사람들 목소리를 듣는 걸 좋아했다. 세상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그의 정치적인 견해가 나와 달라서 우리는 정치에 관한 얘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 많은 부분 그의 정치 색채는 아침에 듣던 그 보수 성향의 종편 방송이나 유튜브 영향이었을지 모르겠다.


그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간혹 하던 출근길 얘기와 전체적인 부산 지형을 고려해 보면 그의 여정이 그려진다.


그는 자택에서 나와 문현동 방향으로 접어들어 산복도로가 이어지는 골목길을 마주했을 것이다. 문현에서 범천, 좌천을 지나 초량, 그리고 연산동까지. 부산의 등줄기를 따라 이어진 오래된 길을 따라 걸었을 것이다.


전포동 산복도로를 지나 어느새 연산동의 아침 공기 속으로 들어섰을 터. 바쁜 출근길인데도 그의 걸음엔 늘 여유가 있었다.


"조금 돌아가도 한적한 이런 길이 좋다"며 산복도로를 예찬하던 그였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골목과 오르막을 택했다. 조금 더 걸려도, 그런 길에서 그는 자신을 회복했을 것이다. 걷는다는 건 그에게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는 방식이었다.


어느 날 그는 말했다. "퇴직하는 날, 고향까지 걸어서 갈 거야." 부산에서 고향까지, 쉬엄쉬엄 며칠이 걸리든 고향까지 걸어가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럴 사람이라 생각했다.


"법무부 차관 지낸 사람이 그렇게 했다네. 나도 그렇게... 고향에 가고 싶다."


나도 말했다. "그 길에 저도 동참하겠습니다."


주변 동료들 중 누구는 자신은 함께 걷지는 못하고 중간중간 여정에 동참하겠노라 했고, 종착점인 그의 고향에서 기다리겠다는 동료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은 시작되지 못했다. 퇴직을 몇 달 앞두고 그의 건강이 나빠졌다.


그리고 오늘, 어버이날 아침. 그가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병든 몸으로 고향을 찾았던 이야기였다.


설 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곳. 초췌한 모습으로 도착한 고향에서, 아흔을 바라보는 형수님이 흐느끼며 "삼촌 얼굴이 왜 이러냐"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좋아지고 있다"는 말만 되뇌며 자리를 피했다고 했다.


선산에 들러 조부모님, 부모님, 형님 묘소에 술을 따르고 어머니 무덤가에 곱게 핀 할미꽃을 바라보다가 수구초심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고 했다.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하고 떠난 길이었지만, 형수님의 눈물 앞에서는 결국 무너졌다는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 뒤를 잇는 문장에는 희망이 있었다. 외손주가 달아준 종이 카네이션, 며느리가 놓아둔 꽃바구니, 아내의 잔소리, 그리고 가끔 안부를 묻는 후배들. "나는 행복하고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 문장은 오래 여운을 남겼다.


그 글을 읽고 한참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큰 병을 안고도 만날 때마다 담담하고 씩씩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다행이라 여겼지만, 그 모습 뒤의 불안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를 따라다녔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마음의 그림자 같은 것.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그는 이겨낼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걸어온 사람이다. 비 오는 날도, 바람 부는 날도, 마음 무거운 날도 걸음을 멈추지 않던 사람. 그의 몸 어딘가에는 여전히 걸으며 쌓은 저력이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걷기로 했던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 약속을 잊지 않았고, 그 역시 잊지 않았으리라. 언젠가 그의 마음이 다시 고향을 향해 걸음을 내디딜 때,


그 여정은 늦더라도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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