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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만큼, 돌아갈 수 있다면

by 박계장

누군가는 별을 이야기할 때, 나는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았다.


인생을 멀리 내다볼 겨를도 없었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딜지가 전부였다. 그 시절의 나는 현실 앞에서 서서히 익숙해져야만 했다.


부산기계공고에 입학할 때만 해도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모두가 선호하던 설계과에 배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실습은 적성에 맞지 않았고, 환경에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성적은 떨어졌고, 자존감도 함께 무너졌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다고 느껴졌다. 도면 한 줄 그릴 때마다 긴장했고, 실수는 처음부터 다시 그리게 만들었다. 실습실에서도, 교실에서도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점점 학교는 나와 멀어졌다.


입학 초에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하지만 군대 같은 규율이 버거워 결국 짐을 싸서 대저동 집으로 돌아왔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우리는 용호동으로 이사했다가 고등학교 입학 즈음 다시 대저동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였기에 풍경 하나하나가 낯설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통학을 시작했다.


학교생활은 여전히 버거웠지만, 책과 영화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쉬는 시간엔 교실 구석에서 책을 읽었고, 주말이면 조용한 구포 국제극장을 찾았다. 매표소 옆에서 과자를 사 들고 극장 안에 앉아 천천히 불을 끄는 순간을 기다리는 시간. 그 조용한 어둠 속에서 나는 일상을 잠시 벗어나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곤 했다.


‘라붐’. 조금 일찍 어른이 된 소녀의 이야기. 소피 마르소의 담백한 눈빛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그 눈빛을 바라보며, 말없이 나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3학년 가을, 서울올림픽의 열기 속에서 장림고개의 레벨게이지 업체로 실습을 나갔다. 설계 부서에 배치됐고, 사람들도 괜찮았지만 그 길이 내 길은 아니라는 걸 느꼈다. 몸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졸업 후에는 속기사 학원과 전산학원을 전전했다. 하지만 마음이 붙지 않았다. 결국 자원입대를 택했고, 군대에서도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제대 후에는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설악산의 능선에서, 거제도의 바람 속에서, 경주의 고요한 돌담길을 걸으며 나는 현실에서 잠시 비켜나, 내 안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그 여정 끝에서 마음이 정리됐다. 공부해서 공무원이 되어보자.


두어 달 집중했고, 운이 따라줬고, 1993년 3월,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


공직 초기에 만난 한 과장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제목을 잘 만들어야 해. 내용은 그다음이지." 처음엔 단순한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말은 일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걸 그분은 알고 계셨다. 그 말은 어느새 내가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시청에 와서 또 한 명의 잊지 못할 과장님을 만났다. 한쪽 팔을 잃은 채 왼손으로 공문을 손보던 그분은, 묵묵히 일하며 후배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 어떤 말보다 실천이 먼저였고, 그 실천 속에 공직자로서 지녀야 할 태도와 책임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고, 그는 늘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나는 그분을 보며, 능력보다 먼저 필요한 건 일에 임하는 자세라는 걸 배웠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이런 친구 한 명만 더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 그 선배의 한마디는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에 단단한 무언가로 남았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조용한 다짐이 그 안에 생겨났다.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은 내 공직생활의 뿌리가 되었다. 그날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어느덧 서른세 해. 지금은 시청의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며 야간 대학원까지 마쳤다.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누릴 수 있었던 안정, 그리고 그 안정 속에서 지켜야 했던 수많은 책임들. 삶은 그렇게 이어졌고, 나는 그 안에서 조금씩 단단해졌다.


돌아보면 이 길은 처음부터 소명의 결과는 아니었다. 큰 이상도, 특별한 계기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선택이 내 삶을 어떻게 품어주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후배들을 품어야 할 때다. 내게 힘이 되었던 말들, 작지만 진심 어린 손길들을 기억하며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 때로는 말보다 함께 버티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언젠가 내가 떠난 뒤에도 ‘그때 그 선배’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꼭 뛰어나지 않아도, 묵묵히 함께 있어주는 사람으로.


시간이 흐르며 질문도 달라졌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을 향해 걸어야 할까.’


청춘이 돋보기를 쓰는 나이가 되었다. 시간은 여느 때처럼 앞만 보고 흘러갔다.


나는 내 아이들이 나처럼 늦게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떠밀리듯 선택하기보다는, 자기 뜻대로 걸어가기를 바란다. 비교보다 믿음을, 조급함보다 의미를 따라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기를 바란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는 내 마음이 원하는 길을 따라가고자 한다.


단지 살아남는 삶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걸 느끼는 삶. 분주함에서 잠시 비켜서서,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그 답을 따라가고 싶다.


삶이 어디로 흐르든, 그 끝에 후회가 남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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