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쯤 전, 서른을 갓 넘긴 내 나이에 일이다.
정확한 해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가족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증조부의 묘소를 찾았다.
부산에서 출발한 승용차는 포항을 지나 동해를 바라보며 5시간 정도를 달렸고,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임도를 따라 올라간 길 끝, 더는 차가 오를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와 숙부, 사촌동생, 그리고 나.
그렇게 함께 길을 나섰다.
산속에 접어든 뒤, 아버지와 숙부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으며 한참을 헤맸다.
"야야, 이쪽 아이가" 아버지가 숙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숙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니더, 좀 더 올라가야 하니더."
시간도 꽤 걸렸다.
마침내 증조부의 묘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묘소는 키 큰 소나무들 틈에 둘러싸여, 한적한 산속 풍경과 어우러져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산줄기가 바람을 막고 있어, 낙엽이 바스라지는 소리조차 잔잔하게 들렸다.
햇살은 가지 사이로 스며들어 묘역 전체를 부드럽게 덮었고, 그늘은 얕고 빛은 따스해 마음까지 평온해졌다.
왜 이렇게 깊고 험한 곳에 묘를 모셨는지, 막상 그 자리에 서보니 알 것도 같았다.
고요하고 아늑한 산중, 조용히 쉬기엔 더없이 좋은 자리였다. 묘소 앞에 선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곳에서 아버지의 얼굴엔 회한과 그리움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는 준비해 온 제물을 놓고 절을 올렸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증조부는 엄격하지만 자상한 분이셨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와 6.25를 겪으며 가족을 지켜내신 분이었다.
우리가 그 묘소를 찾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고향을 떠난 지 30년이 넘은 때였으니,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죄송함이
가슴 한편에 자리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때마침 봄도 깊어, 산자락마다 연둣빛이 부드럽게 번지던 날이었다.
묘소 앞에 선 내가 물었다.
"왜 이런 데다 모신 겁니꺼?"
숨을 고르던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명당이라데. 삼대째 판서가 나온데서"
증조부께서 돌아가셨을 당시, 아버지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고 한다.
그 '삼대째'는 바로 나와 사촌들이었다.
그날 함께 하지 못한 숙부의 아들은 행정학을 전공 중인 대학생이었고, 나는 8급 공무원이었다.
나는 아닐 테고, 그 동생이 고시에 합격해 장관이라도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명당에 대한 기대라는 게, 그렇게 막연한 상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세월은 그런 기대를 비켜갔다.
사촌은 지금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입시학원의 원장으로 살고,
나는 시청에서 일하는, 퇴직을 몇 년 앞둔 사무관이다.
뜻밖의 인연이 문을 열어주고, 운명이 길을 내어주는 일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삶은 영화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장관은, 아무래도 우리 중에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께 여쭌 적이 있다.
"아버지, 우리 증조부 산소에 다시 한 번 가봐야 하는거 아입니꺼?"
아버지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다가,
"묵힌 산소, 가는 거 아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랫동안 찾지 못한 미안함이 아버지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뒤늦게라도 찾아뵙는 것이 오히려 부담으로 느껴졌던 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그저 마음속으로 증조부를 기억하고,
추억 속에서 만나는 편이 낫다고 여기신 것 같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깨닫는다.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건 내 힘만의 결과가 아니었다.
곁에서 힘이 되어준 사람들,
말없이 등을 토닥여준 인연들,
그리고 손주 잘되라고 그 험한 곳에 아버지를 모셨던 조부의 염원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음을.
모든 것이 참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