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들썩이던 그 가을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한창일 때 대한민국은 하나의 거대한 경기장이자 열광의 응원석이었다. 김수녕이 금빛 활시위를 당기고 양궁 금메달이 잇따르던 시절, 나는 부산의 한 중소기업에 실습생으로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곳은 사하구 장림고개에 자리한 레벨게이지 제조업체였다. 부산기계공고 3학년이던 나는 졸업 전까지 현장 실습을 시작했고, 별문제가 없다면 그대로 취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설계팀에 배치되어 하루 대부분을 도면과 함께 보냈다. 연료탱크나 담수탱크의 액체 높이를 재는 레벨게이지를 그렸는데, 모두 주문 제작이라 선 하나, 원 하나가 틀려서는 안 됐다.
밖은 올림픽 열기로 달아올랐다. 칼 루이스가 트랙을 질주했고, 벤 존슨은 9.79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운 뒤 도핑 적발로 메달을 박탈당했다. 환호가 순식간에 침묵과 비난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며, 단단해 보이는 것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나는 책상 앞에서 이 일이 내 길이 아니라는 확신을 키우고 있었다.
12월 초겨울, 설계팀이 바빠지면서 출장 업무가 내게 돌아왔다. 대우조선에 납품한 레벨게이지의 정기 점검을 위해 거제로 향하게 된 것이다. 실습생이었지만 설계팀 소속이라는 이유로 현장 직원을 인솔해야 했고, 어린 마음에도 그 책임이 무겁게 다가왔다.
출장 전날, 함께 이동하기 위해 동행한 직원 댁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곳이 감천동이었다. 집들이 계단처럼 산을 타고 오르되, 앞집의 햇빛을 가리지 않도록 한 층씩 낮춰 지어져 있었다. “여긴 다 그렇게 지어요. 윗집 햇빛 안 가리게.”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깍듯이 존대를 했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아마도 설계팀과 현장직 사이의 업무 관계가 주는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른 아침, 창을 열자 햇살이 지붕 위를 하나하나 쓰다듬듯 내려앉았다. 오래된 동화책 속 그림처럼 따뜻한 장면이었다. 감천동은 해방 이후 태극도 신도들이 이주해 터를 잡은 마을로, 믿음과 일상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태극도 도장이 있었고, 주민들의 삶과 신앙이 함께 숨 쉬었다.
거제에 도착한 우리는 작은 배를 타고 거대한 노르웨이 상선에 접근했다. 배가 파도에 흔들릴 때, 나는 철제 사다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몸을 당겨 올렸다. 한 발 한 발, 발판이 미끄럽지 않도록 힘을 주어야 했다. 배에 오른 뒤 확인한 장비에는 이상이 없었고, 점심은 처음 맛보는 서양식 식사였다. 짠 햄, 부드러운 치즈, 달콤한 과일이 바다 냄새와 쇠내음, 따스한 햇살과 함께 오래 남았다.
졸업 무렵, 나는 회사에 남지 않기로 했다. 설계팀 선배와 차장은 아쉬워했지만 내 결정을 존중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송도 앞바다를 지나다가 옛 기억이 떠올랐다. 바다 조망으로 이름난 고층 아파트 앞에 주거·상업 복합건물(주상복합)이 들어서면서, 파란 수평선이 통째로 가려진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바다 내음 대신 먼지만 흩날렸다.
그 장면은 감천동의 아침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높지 않아도 당당하고, 크지 않아도 따뜻했던 집들이 떠올랐다. 서로의 빛을 가리지 않으려 한 모습이 선명했다.
요즘은 그런 배려를 보기 어렵다. 어린이집 창문 앞에 신축 건물이 들어서 햇살이 막히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안에 있던 사람이 나오기도 전에 밖에 있던 이들이 성큼성큼 타고 들어온다. 안에 있던 나는 몸을 옆으로 비틀어 겨우 빠져나온다. 마트에서는 앞사람이 물건을 다 챙기기도 전에 바짝 다가서고, 골목길에서는 단 몇 초를 기다리지 못해 경적을 울린다. 조금만 여유를 내고 배려한다면 그 순간들은 훨씬 따뜻해질 텐데, 그런 기회들이 사라지고 있다.
살아가다 보면 지칠 때가 있다. 마음이 조급해져 다른 사람을 배려할 여유를 잃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감천동 다락방에서 보았던 아침 햇살이 떠오른다. 앞집의 빛을 가리지 않으려 한 걸음 물러선 그 집들처럼, 나도 누군가의 햇빛을 막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다짐이 나를 다시 숨 쉬게 한다.
감천동은 이제 관광지가 됐다. 화려한 벽화와 조형물이 가득하지만, 변해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서로를 향한 존중, 마음을 낮추는 겸손, 작은 틈에서 피어나는 따뜻함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햇빛일지 모른다.
나는 오늘도 그 기억을 품고 걷는다. 높은 벽보다 낮은 담이 편안하듯, 사람 사이도 그러하길 바란다. 서로의 빛을 가리지 않고 햇살을 나누는 것, 그게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방식이 아닐까. 창밖의 부산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우리는 같은 햇살 아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