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색이 바랜 사진처럼 점점 흐릿해진다.
본 것은 빛에 닳고, 들은 것은 바람에 쓸려간다.
그러나 냄새는 다르다.
어느 날 불쑥, 아무런 예고 없이 기억의 서랍을 열고 들어와 오래된 시간 하나를 꺼내놓는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게, 향기로 말을 건넨다.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다섯 살쯤 되었을까.
할아버지를 따라 아버지 고향 울진의 숲길을 걸었던 날이 있다.
무엇 때문에 그곳에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냄새는 선명하다.
축축하게 젖은 흙길, 풀잎에 맺힌 이슬, 새벽 공기.
숨을 들이마신 순간, 맑고 푸른 냄새가 코 안 가득 스며들었다.
콧속이 시큰할 정도로 청명하고, 마음이 가볍게 가라앉는 듯한 기분.
나는 말없이 다시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
그 냄새를 잊고 싶지 않아서.
그건 단지 숲의 냄새가 아니었다.
자연을 처음 느낀 순간의 냄새였고,
내가 세상과 맞닿았다는 감각이 향기로 남아 내 안에 자리 잡은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봄, 새로 부임한 담임선생님이 우리 앞을 지나가던 순간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번지던 샴푸 냄새는 달큰하고 은은한 과일향이었다.
그 향기는 쌀쌀한 아침 공기, 설렘과 낯섦이 뒤섞인 개학 첫날의 분위기,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선생님’이라는 이름 너머의 한 사람을 바라본 감정과 함께 남아 있다.
이따금 그때의 또래 아이들을 보거나, 개학의 풍경을 마주할 때면
그 샴푸냄새가 되살아나 나를 다시 그 이른 봄날의 운동장으로 소환한다.
고향에서 여름이 깊어가던 어느 밤, 수로 옆 좁은 길을 걸었다.
눅눅한 물비린내, 잡초와 습기 섞인 흙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 냄새를 맡으면 방학 끝자락의 막연한 아쉬움이 떠오른다.
어둠은 깊었지만 이상하게도 외롭지 않았던 밤이었다.
용호동 단칸방 시절의 어느 겨울밤.
엄마가 라면을 끓여주신다며 백원짜리 두 개를 손에 쥐여주셨고,
나는 그것을 꼭 쥐고 점방으로 달려갔다.
달빛아래 맑고 차가운 밤공기가 묘하게 좋았다.
라면 봉지를 품에 안고 돌아오는 길,
그 공기는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시절의 냄새로 남아 있다.
예전에 영화 향수를 본 적이 있다.
냄새가 얼마나 깊이 기억에 스며들 수 있는지를
강렬하게 그려낸 이야기였다.
‘기억 속에 남는 향기란, 어떤 순간에서 비롯되는 걸까.’
내게 오래도록 남은 냄새들은 하나같이
누군가와 함께했던 시간,
따뜻했던 마음과 얽힌 향기들이었다.
냄새는 기억을 건드리고, 감정을 깨운다.
후각은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편도체와 해마에 가장 가까운 감각기관이라 한다.
그래서 냄새는 다른 감각보다 오래, 깊이 남는 것이다.
냄새는 지나간 시간의 그림자이자,
사라졌던 마음을 다시 불러오는 감각의 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의 그 냄새가 어디서 날지 몰라,
오늘도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