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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을 털고, 삶을 걷다

by 박계장

벚꽃이 날리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가지마다 탐스럽게 매달려 있던 꽃들이 이제는 봄바람에 실려 흩날린다. 꽃잎들은 하나둘 인도 위로 내려앉고, 곧 누군가의 빗자루에 쓸려 구석으로 밀린다. 어느새 그 찬란함은 잊히고, 사람들 발길에 흩어지는 흔적만 남는다.


벚나무도 제각각이다. 어떤 나무는 망설임 없이 꽃을 떨구고 초록잎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다. 반면 어떤 나무는 마지막 꽃잎 몇 장을 끝내 놓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매달고 있다. 봄의 끝자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더 머물고 싶은 미련인지, 그 모습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결국 붙잡은 꽃잎조차 바람 한 줄기에 지고 말 것을 알면서도, 벚나무는 잠시 더 버틴다.


그런 벚나무를 보며 사람을 떠올린다. 누구보다 먼저 물러나는 사람도 있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 애쓰는 사람도 있다. 떠날 때를 알면서도 쉽게 비워내지 못하는 마음, 그것은 욕심이기도 하고 두려움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그 자리를 자신인 양 여기며 끝까지 움켜쥔다. 그러나 자리는 결국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누구든 언젠가는 비워야 하는 것이고, 그 퇴장의 순간이야말로 그 사람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이 된다.


나는 문득 생각해본다. 내 퇴장은 어떤 얼굴로 남게 될까. 억지로 붙잡지 않고, 차분히 걸어 나올 수 있을까. 언젠가 돌아보았을 때, 함께한 이들의 마음에 부담보다 온기가 남아 있다면 좋겠다. 누군가의 어깨에 조용히 얹힌 손처럼, 말없이 곁에 있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머무는 동안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는 늘 내 몫이다. 성과보다 태도, 업적보다 온기. 후배들이 기대어 쉬어갈 수 있는 사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는 선배가 되고 싶다. 인정을 갈구하기보다 내가 받은 도움을 되돌려주는 사람. 그게 내가 바라는 어른의 모습이다.


직장생활도 어느덧 끝자락에 와 있다. 30여 년을 달려왔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이 짧은 봄날 같다. 아직 몇 해가 남아 있더라도 마음은 이미 정리의 문턱에 서 있다. 욕심은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조금 더 단정히, 조금 더 따뜻하게 마주하고 싶다. 더 갖기보다 잘 놓는 법을 배우고 싶다. 더 오래가려 하기보다, 더 깊이 스며들고 싶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 시간을 내려놓게 된다. 그 순간은 예고 없이 오고, 붙잡을 수 없다. 그러니 오늘을 더욱 진심으로 살아야 한다. 떠남이 곧 사라짐은 아니다. 제대로 남긴 사람은 떠난 후에도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박지성은 "지금이 물러날 때"라는 말과 함께 정점을 뒤로하고 퇴장했다. 그의 조용한 은퇴는 많은 후배들에게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남았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병상에서도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퇴장의 순간에도 품격을 잃지 않았던 이들처럼, 나도 그렇게 떠나고 싶다.


벚꽃이 지고 나면 초록이 돋는다. 끝은 늘 새로운 시작의 이름을 달고 온다. 떠나는 자리가 비어 허전할 수도 있지만, 남은 사람들이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자리를 정돈해두는 것도 하나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책임의 이행은 오직 나의 방식으로, 나의 태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언젠가 이 자리를 떠날 때, 벚꽃처럼 흩날릴 수 있기를 바란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따뜻하게 기억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른의 마지막은 조용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오늘도 나는 그 마지막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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