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다.
짧게 자른 옆머리 사이로 서리가 내려앉은 듯 희끗한 머리칼이 반쯤을 차지하고 있다.
처음 출근하던 날, 설렘과 긴장으로 매만졌던 까만 머리는
세월을 품은 채 변해 있었다.
시간은 참, 말없이 흘러간다.
한 후배가 떠오른다.
키가 커서 어디서든 눈에 띄는 친구다.
간호사 면허에 민간병원 응급실 경력까지 갖춘 그는,
공직에 들어와서도 응급의료 분야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했다.
응급의료 업무는 평소에는 그리 주목받지 않는다.
그러나 재난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의료 자원을 신속히 투입하고, 환자를 적절한 병원으로 옮기는 일은
시간과 판단의 싸움이다.
마치 전장을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처럼, 현장을 조율해야 한다.
긴장감 속에서 비상근무를 감내해야 하기에
많은 직원들이 꺼려하는 자리지만, 그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전문지식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에
사명감을 가진 ‘공직자’였다.
어느 여름, 태풍이 예보된 날이었다.
시청은 즉시 비상근무 체제에 들어갔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고, 근무는 곧 해제되었다.
하지만 그는 상황을 마무리하느라 늦은 시각까지 퇴근하지 못했고,
결국 집에도 가지 못한 채 사무실 바닥에 요가 매트를 깔고
등산용 침낭에 몸을 뉘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국장님이 부서를 둘러보다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간부회의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그 친구는 평소에도 참 성실하더니, 어젯밤엔 집에도 안 가고
상황을 끝까지 챙겼더군요. 특진이라도 시켜야 할 사람입니다.”
그 말 한마디는 부서 전체에 퍼졌고,
그는 더 큰 책임감으로 더 열심히 일했다.
비슷한 일이 내 친구에게도 있었다.
재난안전 분야에서 일하는 계장인데,
그가 속한 국에서 기자단 간담회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원래는 과장급 이상만 참석하는 자리였지만,
국장이 그도 함께 참석하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는 ○○계장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믿어주는 상사가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정말 큰 힘이 되더라.
그 말 한마디 덕분에 그땐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지.”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한 선배가 여러 자리에서 내 일처리를 두고
“그런 친구 하나만 더 있으면 못할 일이 없겠다”고 말했다.
조용히 지켜봐 주고 나를 인정해 준 선배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생겼고,
나는 내 몫 이상의 책임을 기꺼이 감당했다.
짧은 말이지만, 그 한마디가 사람을 움직인다.
공직생활 곳곳에서 나는 그 힘을 느껴왔다.
“덕분에 일이 잘 풀렸어.”
“네가 맡으니 든든하다.”
그런 말들은 지친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긴 하루의 끝자락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딛게 만든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말만 오가는 건 아니다.
가끔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방향은 제시하지 않고 흠만 지적하거나,
업무의 핵심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결재를 미루며 실무자만 애태우는 일도 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그래서 내가 찜찜하다고 했잖아”라며
책임을 슬며시 떠넘기기도 한다.
그럴 때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들도 누군가의 격려 속에서 성장했을 텐데,
그 온기를 왜 더는 나누지 않는 걸까.
서로의 수고를 알아봐 주고,
잘한 일은 아낌없이 칭찬하는 분위기.
힘든 일은 혼자 감당하게 하지 않고,
함께 고민해 주는 동료들.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은 사람도 조직도 함께 자란다.
사실, 꼭 거창한 말이 필요한 건 아니다.
“역시 ○○ 주무관이야.”
“이번 일, 네가 큰 역할 했어.”
진심이 담긴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 말만으로도 고생했던 마음이 풀리고,
다음 일을 맡을 때 한결 가벼운 마음이 된다.
돌이켜보면, 내 마음에 오래 남은 건
성과보다 사람이었다.
큰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기억보다,
“자네 덕분이야”라는 말이 더 또렷하다.
그 말들은 내가 흔들릴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이제는 내가 그런 말을 전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격려 한마디에 후배의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며,
일터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연결임을 실감한다.
그 짧은 말이,
누군가의 하루를 버텨내게 하고,
다음 날을 조금 더 힘 있게 시작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