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두어도 자연스럽게 왕래는 끊겼을 텐데.
그런데도 나는 왜, 아들을 달래 가며 착한 며느리 역할에 연연했을까.
착한 껍질을 벗는 순간, 무슨 낯빛을 마주할지 궁금해졌다.
“다음 달부터 엄마, 누나네 집에 와 있을 거야. 알고 있지?”
물론, 남편보다 내가 먼저 알았다.
아들과 딸보다 며느리와의 통화가 더 잦았으니까.
둘째 손자를 돌보기 위해, 그의 엄마가 딸 집으로 올라오기로 했다.
"잘 들어. 엄마 올라오면 넌 누나 집에 발길 끊어.
괜히 불려 가서 한두 번 애 봐주고 그러지 말라는 말이야.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나중엔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거 네 일 된다, 뻔해.
아예 시작하지 마."
남편은 끝내 다짐을 받아냈다.
누나네와 집을 지어 함께 살자는 계획도 자연히 무산되었다.
남편의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특별한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얼마 전 그의 엄마가 예고 없이 찾아온 이후,
시누이와 같은 건물에 산다는 그림은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단 둘 뿐인 남매 사이가 돈독하면 좋겠다 싶어, 하던 노력도 멈추었다.
겪은 일이 많아서 깨달은 걸까.
아니면, 한 번 상한 감정이 도미노처럼 다른 것까지 무너뜨린 걸까.
어쩌면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더는 이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근데 너무 멀리 이사하면 어머님 병원 모시기 어려워지니까..."
"그거, 결혼 전에도 다 알아서 했던 일이야.
걱정은 자식이 해야지. 그걸 네가 왜 걱정해? "
이제부터 타 지역에 청약을 넣기로 했다.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고, 다소 즉흥적이었다.
조건은 남편이 출퇴근할 수 있는 범위 이내의 아파트.
올라오는 순서대로 다 넣어보기로 했다.
그날 밤 마감 직전인 아파트에 신청을 접수했다.
그리고 갑작스레 당첨이 되었다.
투기과열지구에서 몇 년 동안 밀려나던 우리는, 청약이 이렇게 수월할 줄 몰랐다.
다분히 충동적이었고, 호재가 거의 없는 외곽이라 투자가치가 적은 곳이었다.
약간의 후회도 되었지만, 어차피 물릴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우리는 시누이와 시누이의 시어머니와 한 동네에서 드디어 탈출했다.
그때까지도 그의 엄마는 시누이의 집에 상주하던 중이었다,
원래는 어린이집에 들어갈 때까지만, 2년쯤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엄마는 내려가지 않았고, 결국 4년을 딸 집에 머물렀다.
만약 우리가 그 근처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면, 지금쯤 어땠을까.
생각할수록 아찔해졌다.
내분비내과 두 번, 신경과 두 번.
정기검진은 1년에 네 번이었고, 그 외 검사 일정도 빠짐없이 내가 동행했다.
외래가 아침 일찍 잡힌 날엔 오후 두 시가 넘어 돌아왔다.
늦은 예약이면 병원만 다녀와도 하루가 통째로 사라졌다.
가족 모두 직장에 다니고, 나 혼자 집에 있었으니 당연했다.
불만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검진을 앞두고, 그의 엄마는 하루이틀쯤 우리 집에 머물렀다.
진료 전에 피검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날은 나도 함께 금식했다.
굶고 있는 어르신 앞에서 혼자 밥을 챙겨 먹을 수는 없었다.
경기도에서 서울 도심의 대학병원까지 가는 길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출근길 정체를 피하려면 새벽 다섯 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7시에 문을 여는 검사실 일정에 맞춰 피검사를 마치고, 9시에서 11시 사이 진료를 받는다.
이후에는 혼자 약을 타러 뛰었다.
무릎 수술을 받은 그의 엄마는 로비에 앉아, 날 기다렸다.
병원 밖, 제법 떨어진 외부 약국까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기다리는 그의 엄마를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점심은 언제나 푸드코트에서, 익숙한 메뉴를 골랐다.
그의 엄마는 김밥을 좋아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김밥을 싫어하셨다.
평소엔 눈치가 보여 못 먹지만,
'너 만났을 때나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항상 같은 메뉴였다.
어느 날은 반복되는 메뉴가 지겨워 다른 음식을 시켜보았다.
푸드코트 특성상 먼저 조리된 메뉴가 빠르게 나왔다.
그의 엄마가 식사를 마칠 무렵에서야 내 밥이 나왔다.
결국, 그날은 체하고 말았다.
“임병. 따로 시킨께, 드럽게 오래 걸리고 지랄이다잉.”
억지로 밥을 삼키다 말고 숟가락을 내려놓았지만,
‘남기면 못 쓰는 음식’은 끝까지 먹어 치워야 했다.
"어머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까 안 싸고 뭣했냐?"
집에 가기 위해 걸었던 시동을 끄고, 화장실로 뛰었다.
매운 김치찌개를 토해내자, 목과 코가 얼얼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다른 메뉴는 아예 시도하지 않았다.
외래 날 뿐 아니라, 평소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님이 함께하지 않는 날이면 늘 김밥이었다.
반면 아들과 함께인 날엔 샤부샤부나 중식당에도 갔다.
결혼 2년 차 무렵이었다.
"야, 오늘은 저번에 은희랑 갔던 밥집 가자. 5층이냐, 6층이냐?"
"오늘은 왜 김밥 안 드시게요?"
"나, 아부지한테 혼났어야."
단둘이 외식한 날 중 유일하게 김밥이 아닌 메뉴를 먹은 날이었다.
‘느그 아부지가 며느리 하찮은 거 먹이지 말라고 난리다.’
식사 내내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시아버지의 신신당부에 그의 엄마의 심기가 단단히 꼬였다.
"어머님, 다음부터는 그냥 김밥 먹어요. 저도 좋아해요."
"그치? 너도 좋아하지야잉?"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엄마 입가에 웃음이 스쳤다.
그제야 맘 편히 숟가락을 놀릴 수 있었다.
"오매!"
밥을 먹던 그의 엄마가 어딘가로 반가운 눈빛을 보냈다.
저만치서 시누이가 다른 의사들과 함께 식사 중이었다.
형님은 이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다.
"아무튼 너 진짜 명심해. 엄마가 부른다고 끌려다니지 마.
병원도 신경 쓰지 마.
자기 애 봐주러 올라오는 건데, 자기가 모시고 다녀야지.
매형 육아 휴직도 냈어. 넌 그 집 일 신경 꺼 진짜."
가시가 돋친 듯한 남편의 말투는 사실,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모든 일을 다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상처가 있었다.
가끔 내뱉는 투덜거림은 단순한 불만보다 해묵은 감정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 느꼈던 서운함이 상처가 되어 해소되지 않고 굳어진 것 같았다.